아주 중요한 질문들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질문: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대답: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이처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냥 간단히 온 세상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믿음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편 19:1-4). 별들을 볼 때, 우주의 거대함을 헤아릴 때, 자연의 경이로움을 관찰할 때, 일출의 아름다움을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이런 것들로 불충분하다면 우리 마음이 또 증거합니다. 전도서 3:11에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존재 깊은 곳에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식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여전히 부인할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시편 14:1). 역사가운데, 모든 문화와 문명가운데, 모든 대륙에서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이 믿음을 생기게 한 무엇인가가 혹은 어떤 인격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의 증거 외에 논리적으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논할 수 있습니다. 첫째, 존재론적 논쟁.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비길 데 없이 가장 큰 자”로 정의함으로 논리를 펼칩니다. 일단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큽니다. 고로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가 될 수 없고 이는 초기에 설정해 논 정의에 모순됩니다.

둘째, 목적론 논쟁. 즉 이토록 놀랍도록 설계된 우주는 그 배후에 반드시 이런 디자인을 고안해 낸 신적인 존재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몇 백마일 가깝거나 멀기만 하여도 지금처럼 많은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 생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대기상의 요소들의 구성 비율이 조금만 달라졌다 하더라도 지구상의 많은 생물들이 죽었을 겁니다. 또 단 한 개의 단백질 분자가 우연히 형성될 가능성은10243 분의 1인데, 단세포는 한 개가 아닌 수 백만 개의 단백질 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우주론적인 논쟁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과물입니다. 이 결과물들을 일으킨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생성하기 위해 결국 생성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서 생성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넷째, 도덕적 논쟁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는 일정 형식의 법을 지니고 있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살인, 거짓말, 약탈, 부도덕 이것들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합니다. 이렇게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서 파생된 것이겠습니까?

이 모든 논쟁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이 분명하고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거짓을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5은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성경은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핑계 댈 수 없다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몇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실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드러나고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3; 6:23).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지 걱정할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선택사항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사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려는 그 시도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매일 그 분께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느끼고, 그 분의 사랑을 압니다. 그리고 그 분께 은혜를 구합니다. 내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놀랍게 나를 구원하셨고 내 삶을 변화시키셨기에 그 분의 존재를 인식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논쟁들 자체는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거부하는 자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니까요 (히브리서 11:6).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캄캄한 곳의 희미한 사다리가 아니라, 그 분의 존재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방을 향하는 안전한 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제적 존재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게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문: 하나님은 실제적 존재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게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
하나님은 자신을 세가지 면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창조물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증거는 그가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다내는도다” (시편 19:1).

만약 내가 들판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주웠다면, 그것이 갑자기 만들어졌다거나 원래 그 곳에 계속 있어 왔다고 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시계의 디자인을 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위에서 더 훌륭하고 정밀한 디자인을 보게 됩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인 지구의 일정한 자전에 있습니다 (또한 세슘-133 원자의 방사능 성질에도 있습니다). 우주는 훌륭한 디자인을 전시해 보이고 이는 또한 훌륭한 디자이너를 증거합니다.

당신이 암호문으로 된 메시지를 발견했다면 그 암호를 해독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암호를 생성해낸 높은 지능을 갖춘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각 세포 안의 DNA 체계는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럼 그 DNA의 복잡성과 용도를 구성한 자는 누구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복잡하지만 잘 조화된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또한 각 사람의 마음에 영원한 것을 인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전도서 3:11).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과 지구를 초월하는 것들을 지각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최소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배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명은 일정한 도덕적 법규를 가치있게 여겨왔습니다. 놀랍게도 문화들간의 비슷한 점이 많을 정도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개념은 전세계적으로 높임을 받는 반면 거짓은 질타를 받습니다. 이 공통적인 도덕성,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지구상의 이해는 이런 양심의 가책을 부여한 가장 높은 도덕적 존재를 주목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막론하고 예배의 문화를 형성해왔습니다. 숭배의 대상은 다양하나 인간보다 높은 어떤 힘의 존재를 숭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예배하고자 하는 성향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명한 사실로 다룹니다 (창세기 1:1; 출애굽기 3:14). 누구나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의 책에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시간 낭비하시지 않습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무결하고 기적을 불러오는 성경책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살펴보게끔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십니다 (요한복음 14:6-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 14).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골로새서 2:9).

예수님의 생애 동안 그는 구약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그는 자신의 신성과 그의 말씀이 참된 것임을 확증해 주시려고 수많은 긍휼과 공공연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21:24-25). 그리고 그의 십자가형을 당한 삼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수 백명의 사람이 이를 목격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6). 예수를 증거하는 역사적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사도행전 26:26).

하나님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해와 증거를 가지고 의심하는 자들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 증거도 대지 못하는 자들도 만날 겁니다 (시편 14:1). 그러나 결국 모든 자가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까?



질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까?

대답: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정확히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부인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를 언뜻 보면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3). 이것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함으로서 본인이 하나님 되심을 정말로 뜻하셨음을 지적합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를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모독감에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말입니다 (레위기 24:15).

요한은 예수의 신위에 대한 개념을 반복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암시합니다. 사도행전 20:28 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라.” 누구의 피로 교회를 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 20:28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피로 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외쳤습니다 (요한복음 20:28). 예수께서도 도마의 고백을 정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디도서 2:13은 우리의 하나님 구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라 합니다 (베드로후서 1:1 또한 그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8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한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0).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도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 (마태복음 2:11, 14:33, 28:9,17; 요한복음 9:38). 예수님은 자신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해 경배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그 천사처럼 말이죠.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다른 많은 구절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2).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무한한 하나님께 대항한 우리의 죄값을 대신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그런 영원한 대가를 담당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의 죄를 지고, 죽고, 죄와 죽음을 이긴 부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대답: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라는 질문과는 달리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 했는지를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약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체성을 논할 때 많은 논쟁들이 시작 됩니다.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는 선지자, 선한 교사, 혹은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는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서술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도덕 교사로 받아 들일 수는 있으나 그가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은 거부한다.’ 나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을 저지하고 싶다. 이렇게 만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예수가 언급했던 말들을 했다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훌륭한 도덕 교사가 될 수 없다. 헛소리를 헤대는 미치광이거나 지옥의 악마로 불리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니면 미치광이인지를 말이다. 그를 바보라고 욕하며 입을 다물게 하던지, 그에게 침을 뱉거나 악마로 취급하고 죽일 수도 있고 그의 발 아래 무릎 꿇고 그를 주님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발 그를 말도 안 되는 대단한 교사로서는 포장하지 말자. 그는 그런 선택을 우리에게 남기지도 않았고, 의도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의 예수님의 말씀 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이 무언가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이라 주장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해석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 이렇게 말씀 하심으로 본인이 하나님되심을 진실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을 듣고는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59). 예수님이 말씀 하신 “내가 있느니라 (I am)” 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으로(출애굽기 3:14) 예수님은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부르짖었습니다 (요한복음 20:28). 예수님도 이런 도마의 고백을 교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디도서 2:13),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후서 1:1)라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성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예언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C.S. 루이스도 말했듯이 우리는 예수를 훌륭한 교사로 선택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뚜렷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지자나 좋은 교사나 거룩한 자로도 불릴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을 해석하려는 현대 학자들은 과거의 실제 존재했던 예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예수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2000년이나 후에 태어난 현대 학자가 예수님과 같이 살았고, 섬겼고,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26)?

그럼 예수님이 누구인지가 왜 이렇게 중요한 걸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실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영원한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 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되심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인가?



질문: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인가?

대답: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만이 소유한 권한을 예수님께서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 5:31; 골로새서 3:13; 시편 130:4; 예레미야 31:34). 또한 예수님은 그와 연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디모데후서 4:1) 자라고 말 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20:28). 바울은 예수님을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디도서 2:13) 라 했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다고 강조 했습니다 (빌립보서 2: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히브리서 1:8). 요한은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 예로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지만 (요한계시록 1:17; 2:8; 22:13; 고린도전서 10:4; 베드로전서 2:6-8; 시편 18:2; 95:1; 베드로전서 5:4; 히브리서 13:20) 사실 이들 중 단 한 구절 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또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예전 명칭) 에게만 쓰여졌던 칭호가 주어집니다. 구약의 “구원자” (시편 130:7; 호세아 13:14) 는 신약의 예수님께도 쓰입니다 (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5:9). 또 예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마태복음 1장에 있는대로 불립니다. 스가랴 12:10 에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런데 이 말씀이 신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도 인용됩니다 (요한복음 19:37; 요한계시록 1:7). 여호와가 찔림을 당해 사람들이 바라볼 것이라 했고,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면, 예수님은 여호와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사야 45:22-23을 빌립보서의 2:10-11에 인용하여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또 기도문에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같이 사용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 기도는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단수형)”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4) 으로 세례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는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21; 11:38-44), 죄를 용서하시고 (사도행전 5:31; 13:38),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탱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2; 골로새서 1:16-17). 이는 여호와가 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이사야 44:24)을 생각할 때 훨씬 확실해집니다. 게다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한 자질을 지닙니다. 영원성 (요한복음 8:58), 무소부재하심 (마태복음 18:20, 28:20), 전지하심 (마태복음 16:21), 전능하심 (요한복음 11:38-44)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입증해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그저 믿게 하려고 속이는 것은 완전히 틀립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신성한 기적들로 그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그의 몇 가지 기적들의 예 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요한복음 2:7), 물 위를 걷고 (마태복음 14:25), 보이는 물체들을 배가시키고 (요한복음 6:11), 눈먼 자와(요한복음 9:7), 절뚝거리는 자와 (마가복음 2:3), 아픈 자를 치유하시고 (마태복음 9:35; 마가복음 1:40-42), 또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43-44; 누가복음 7:11-15; 마가복음 5:35). 게다가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화의 신들이 살고 죽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부활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도 않습니다. 또 특별히 문서로 기록해 입증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12가지의 역사적 사실은 비기독교인 비판학자들도 인정할 것이라 합니다.

1.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2. 그는 묻혔다.
3. 그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시켰고, 모든 소망을 잃게 했다.
4. 예수의 무덤은 몇 일 뒤에 빈 채로 발견되었다.
5.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제모습을 경험했음을 믿었다.
6. 이 경험 후에 제자들은 의심 많은 자들에서 담대한 증인으로 변모하였다.
7. 부활의 소식은 초기 교회 설교의 중심이었다.
8. 부활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었다.
9. 이 말씀의 결과로 교회는 새로 태어났고 자라갔다.
10. 부활절 즉 일요일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대신하여 예배 드리는 날로 지정되었다.
11. 회심주의자 야고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12. 기독교도의 대적이었던 바울은 특별한 경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삶이 완전히 변화했다.

누군가가 이 목록 사항에 이의를 제하더라도,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세우는데는 몇 가지 항목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나타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5). 이 항목들을 설명하는 몇 개의 이론들이 있더라도, 오직 부활만이 이 모든 사실을 입증합니다. 여러 비판설도 제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거짓말이나 환상도 이 부활이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 만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과연 부활에 대한 주장으로 누가 어떤 이익을 보았겠습니까? 당시 기독교도는 환영 받지 못했고 돈을 벌어다 주는 종교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누가 순교하겠습니까?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그 잔인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 했다는 것은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로 여기는 것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부를지언정 진실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을 위해서는 죽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여호와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단지 어떤 하나의 신이 아닌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 예수를 따르는 자들 (우상숭배를 혐오하는 유대인들) 은 예수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기적들을 통해 특히 전 세계를 뒤흔든 부활을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가설로도 이 부활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적 신성 이십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이며 기독인들이 믿는 신앙의 교리는 무엇인가?



질문: 기독교는 무엇이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앙은 무엇인가?

대답: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5:1-4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앙과 달리 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종교적 예식거행보다 관계를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기사항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가까이 동행하는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업적과 성도들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 덕분에 가능케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넘어서 기독교는 무엇이며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은 감동감화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은 최종적 권위를 지닙니다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1:20-21). 기독교는 세 인격이신 성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의 일체를 믿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믿습니다 (로마서 3:23; 5:12). 또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이 땅을 몸소 걸으셨고 (빌립보서 2:6-11),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가르칩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장사된후 부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셔서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해 항상 중보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7:25). 또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진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9:11-14; 10:10, 로마서5:8; 6:23).

기독교는 사람이 구원받고 죽은 후 천국으로 가기위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위에 이루신 일을 전적으로 믿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믿는 다면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 외에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자가 동일히 죄인이기에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히 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4:6-7; 53:6). 구원을 위해 더 이상 이루어질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그 말은 우리의 속죄가 완성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 따르면 구원은 죄에 대한 자유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자유입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였다면, 지금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로마서 6:15-22). 믿는자가 죄된몸으로 이땅에 사는 한 죄와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투쟁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성령님의 지휘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금기사항을 중요시 하는 동안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후 부활 하셨음을 믿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승리 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격이 말하는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질문: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대답: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말 해 줍니다.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보다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말입니다 (욥기 42:7).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어긋난 이해는 거짓 신들을 세우고 따르고 숭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3-5).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혹은 본질 중에 하나는 “빛” 입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60:19, 야고보서 1:17).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은 등한시 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 창조론, 성경, 그리고 육신이 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창조물의 한 부분이며 (창세기 1:1; 시편 24: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데서 시작 합시다. 사람은 다른 많은 창조물보다 높고 창조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1:26-28). 그 후 창조물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손상되었습니다만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17-18; 로마서 1:19-20). 그 많은 피조물들의 광대함, 복잡성, 아름다움,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몇 가지 다른 이름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도와줍니다.

엘로힘- 강한 자, 신적인 존재 (창세기 1:1)
아도나이- 주,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출애굽기 4:10, 13)
엘 엘리온- 가장 높은 자, 가장 강한 자 (창세기 14:20)
엘 로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강한 자 (창세기 16:13)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1)
엘 올람- 영원한 하나님 (이사야 40:28)
야훼-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출애굽기 3:13, 14)

하나님은 영원이시고 그분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영원히 멸하지 않고 무한합니다 (신명기 33:27; 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심 즉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말라기 3:6; 민수기 23:19; 시편 102:26, 27). 하나님은 비교 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그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무엘하 7:22;시편 86:8; 이사야 40:25; 마태복음 5:48). 그분은 신비하고, 심오하시며, 찾아낼 수 없고, 지나간 과거의 것을 찾으면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40:28; 시편 145:3; 로마서 11:33, 34).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편애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32:4; 시편 18:3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행하심은 항상 그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19:6; 예레미야 32:17, 27). 하나님은 동시에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이란 뜻은 아닙니다 (시편 139:7-13; 예레미야 23:23). 하나님은 전지 하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십니다. 심지어 순간 순간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까지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의 판단은 공정 합니다 (시편 139:1-5; 잠언 5:2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 입니다. 그 분 홀로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이 우리의 숭배와 헌신의 대상되십니다 (신명기 6:4).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잘못을 간과하거나 지나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겪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애굽기 9:27; 마태복음 27:45-46; 로마서 3:21-26).

하나님은 주권자 이십니다 즉 모든 것 위에 최고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 합쳐도 그의 목적을 뒤엎을 수 없습니다 (시편 93:1; 95:3; 예레미야 23:20). 하나님은 영 이십니다 즉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8; 4:24). 하나님은 삼위일체 이십니다. 본질이 같고 동일한 능력과 영광을 지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하나 되십니다. 하나님은 진실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본인이 청렴결백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시편 117:2; 사무엘상 15:29).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모든 도덕적으로 패역하고 훼손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계시고 그것들을 적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한 것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 참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6:3; 하박국 1:13; 출애굽기 3:2,4,5; 히브리서 12:29).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그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 친절하심, 자비로우심, 그리고 사랑을 포함합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그의 다른 모든 성품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기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34:6; 시편 31:19; 베드로전서 1:3; 요한복음 3:16; 17:3).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질문: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대답:
이 질문의 답은 성경에 대한 관점이나 우리 삶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하고, 알아가고, 순종하고, 신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자 하심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과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인류에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성경에 드러내지 않으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이 계시입니다.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계시는 약 1500년간 점진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기 위해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또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은 모든 교리상의 문제, 종교의식, 그리고 도덕문제의 최종 권위가 됩니다.

그럼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성경이 그저 좋은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입니다. 다른 종교 문헌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며, 모든 교리와 현실적용에 대한 해답이라는 주장을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에 쓰여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서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의 내부와 외부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부적 증거는 성경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으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입니다. 그중 첫번째는 성경말씀간의 일치입니다.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지고, 세 개의 대륙에서, 세 개의 언어로, 약 1500년 동안, 다른 삶을 살았던 40명 이상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되지 않고 한 권 안에 모든 내용이 일치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다른 책들과 차별화 된 점이며 하나님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또다른 내부적 증거는 성경의 자세히 적힌 예언들입니다. 그 예언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각 나라들의 미래, 특정한 도시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 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야와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위한 구원자가 오실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서적이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는 달리 성경적 예언은 매우 구체적이며 그 성취가 불발된 적이 없습니다. 구약의 300개 이상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느 혈통에서 나올 것인지 뿐 아니라, 어떻게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까지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 외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문서도 성경과 같은 형태나 비슷한 정도의 예언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세번째 내부적 증거는 성경만의 독특한 권위와 능력입니다. 이는 앞의 두 가지 내부적 증거보다 다소 주관적이나 성경이 하나님께로 나왔다는 것을 강력히 증거하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다른 서적과 다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은 수 많은 사람들의 변화된 삶 가운데 나타납니다. 약물중독자가 치유되고, 동성연애자가 자유케되고, 낙오되고 버려진 자들이 새로운 삶을 누리고, 흉악범들이 교화되고, 죄인들은 징계 받고, 그리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은 활력있고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내부적인 증거 이외에 외부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경의 역사성입니다. 성경의 자세한 역사적 사건 기록은 다른 역사적 문서와 같이 그 진실성과 신뢰도가 검증됩니다. 고고학적 증거와 다양한 문서들이 성경에 있는 역사적 이야기들이 실제이고 신뢰성을 검증합니다. 사실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모든 고고학적 증거와 사본들은 성경을 고대시기부터 가장 잘 문서화된 책으로 간주합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종교적인 주제나 교리들을 다룰 때 그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체화시키는데 있어 성경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또다른 외부적 증거는 저자들의 진실함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거처럼, 하나님은 각양각색의 사람을 사용하여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볼 때 그들이 얼마나 진실한 자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 죽는 그들을 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실되게 믿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을 쓴 저자들이나 다른 많은 신자들 (고린도전서 15:6)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그와 함께 하였고 또 성경에 쓰여진 말씀들을 직접 육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이들의 삶은 놀랍도록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숨던 자들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메시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합니다.

마지막 외부적 증거는 성경의 불멸입니다. 성경은 중요성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 때문에 역사적으로 악독한 공격과 파괴하려는 시도에 시달려 왔습니다. 초기로마제국부터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거쳐 근대 무신론자들의 공격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책으로 지탱해 왔습니다.

시간을 거치면서 회의론자들은 성경을 그저 신비한 것으로 여겼지만, 고고학자들은 역사적으로 보아왔습니다. 반대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원시적이고 낡은 것이라 비난했지만 성경의 도덕적인 면과 가르침들은 전 세계의 사회와 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과학, 심리학, 정치운동들에 의해 계속되는 비난가운데 있지만 성경이 쓰여진 초기시대처럼 여전히 진리이며 유용합니다. 지난 2000년간 수 많은 삶과 문화가 성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반대자들이 비난하고, 파괴하고 평판을 손상시키든지 간에 성경은 그런 비판 후에도 여전히 힘있고 진실되고 유용합니다. 이런 모든 비난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그 진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쏟아지는 비난 가운데에서 항상 변하지 않고 손상되지 않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13:31)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증거들을 볼 때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말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질문: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대답: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삶의 목적, 성취, 만족을 찾아 낼 수 있을까? 과연 영원히 중요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성취하려고 한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왜 인간관계에는 금이 가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지 의아해 합니다. 한 운동선수가 최고 정점에 오르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처음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해주었으면 좋았을 말은 무엇이었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줬다면 좋았을거에요.” 목표들은 이루고 나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공허한 결과를 가져오곤 합니다. x

인본주의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업의 성공, 부, 인간관계, 좋은 인간 관계, 성관계, 오락, 그리고 선행 등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 부, 인간관계, 그리고 쾌락을 얻고 나서도 그들 깊은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증언합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 느낌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라고 말 했습니다. 저자인 소로몬 왕은 측량할 수 없는 부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녔으며,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다른 왕국들이 부러워할 만한 궁전과 정원, 가장 좋은 음식과 술, 모든 종류의 오락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원하고 추구했던 것들을 언급하고 나서 “해 아래 있는 삶” 즉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삶은 헛되다고 말 했습니다. 왜 그런 허전함이 생길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위를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 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다…” (전도서 3:11). 우리의 마음은 “지금 여기 (here-and-now)”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성경 첫 부분인 창세기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 여기서 우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죄로인해 타락하기 전 그리고 땅이 저주받기 전에는 다음 구절들이 말 하는대로였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창세기 2:18-25); (2)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셨다 (창세기 2:15); (3)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하셨다 (창세기 3:8); 그리고 (4)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창세기 1:26). 이 사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인간들이 삶을 성취하는 데 있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특히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인간의 죄와 저주받은 땅으로 인해 변해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x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의 천국과 땅을 멸하시고 새 천국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때에는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불의하다 심판 받고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죄로 인한 저주, 슬픔, 병, 죽음, 고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7).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제 하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 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그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삶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삶에 지나지 않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기쁨을 가능하게 하셨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3:43), 이 땅에서의 만족되고 충만한 삶을 가능하게 까지 하셨습니다. 그럼 천국에서의 그 영원한 기쁨을 이 땅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삶의 의미

현재와 영원한 삶의 의미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면서 잃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발견됩니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도행전 4:12; 요한복음 14:6; 1:12). 영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더 이상 죄 가운데 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때,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기 시작할 때 얻게 됩니다.

이제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예수를 구세주로 찾는 데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고, 배우고, 그의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고, 기도로 대화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과 동행하는데서 발견됩니다. 당신이 크리스챤이 아니라면 (혹은 초신자 라면) “별로 그렇게 기쁠 것 같지 않은데!” 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라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8-3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하반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이 말씀들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내 삶을 계속해서 스스로 인도해 결국 허무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만하고 소망이 가득차며 자족하는 삶의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삶은 아닌 가장 충만한 삶).

크리스챤의 삶은 이렇게 비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열렬한 스포츠 팬으로서 게임을 보러갈 때 몇 푼 안들여서 먼 좌석을 살 수도 있고 몇 만원을 들여서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좌석을 살 수 도 있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일을 아주 가까이서 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으려면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의 제자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지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값을 지불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한 자들). 그들은 가장 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이며 나중에 자신과 동역자들과 창조주를 후회없이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값을 지불하셨습니까? 아니면 기꺼이 지불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다시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헤메이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약 성서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질문: 기독교는 구약 성서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대답: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본래 구약성서의 율법이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 어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법에 대해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어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형식 과 속죄 하는 법 (희생) 에 대해 말 합니다. 또 어떤 율법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들만의 규정 (음식과 의복에 대한 규정)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규정들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구약의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우리는 구약성서의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의 법 (갈라디아서 6:2)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꼐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이 두 가지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40). 하지만 구약 율법이 오늘날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율법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표본 입니다. 동시에 구약 율법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 된다고 말 하는 것은 잘 못 된 일입니다. 구약 율법은 단일체 이기 때문에 모두 적용되거나 아니면 모두 적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십계명은 구약 율법을 요약 해 놓은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신약에서 반복되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제외한 모든 것).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신들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들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소유를 탐내지 않아 할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목적은 율법을 지키지 못 하는 자신을 알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 입니다 (로마서 7:79; 갈라디아서 3:24). 하나님께서는 구약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적용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충실하게 행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율법사항들을 만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하는 것인가?



질문: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하는 것인가?

대답:
이 질문은 아마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종교개혁의 동기가 되었고, 개신교와 카톨릭교회가 분리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또 이는 성경적인 기독교와 기독교 내의 종파를 구별시키는 열쇠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더해진 행위에 의한 것인가? 나는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 받았는가 아니면 예수에 대한 믿음과 특정한 공적에 의해 구원 받았는가?

오직 믿음으로냐 혹은 믿음과 행위로서냐 라는 이 질문은 성경 구절들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서 3:28, 5:1 과 갈라디아서 3:24을 야고보서 2:24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분은 바울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과 야고보 (믿음과 행위로 얻는 구원)의 차이를 느끼실 것입니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독단적으로 말하는 것 같이 보이는 반면 (에베소서 2:-9),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 두 가지로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외관상의 문제는 야고보가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검토해보고 나면 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아무런 선한 행위를 가져오지 않는 믿음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7-18).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의 진실된 믿음은 변화된 삶과 선한 일들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야고보서 2:20-26).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진정 의롭게 된 자는 그의 삶 가운데 선한 일들을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은 신자라고 하면서 삶 가운데 아무런 선한 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 17, 20, 26).

바울도 그의 글에서 동일하게 말합니다. 신자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하는 선한 열매들이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소식에 바로 이어 (에베소서 2:8-9)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존재라고 알립니다 (에베소서 2:10). 바울도 야고보 만큼이나 우리의 변화된 삶을 기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야고보와 바울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같은 주장을 하는데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 뿐 입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의 진정한 믿음은 선한 행위를 꼭 가져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령은 누구신가?



질문: 성령은 누구신가?

대답:
성령의 정체에 대해 잘못된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단순히 신비적인 힘으로 봅니다. 다른 이들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만 가능한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봅니다. 그럼 성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령은 인격체이시며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 되심은 여러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데 사도행전 5:3-4도 포함이 됩니다.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인 것에 대해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무소부재하심이 시편 139:7-8에 나타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또 고린도전서 2:10-11에는 성령의 전지함이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게다가 성령은 생각, 감정, 의지를 지닌 거룩한 인격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생각하고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슬퍼하시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30). 성령은 우리를 위해 탄원하십니다 (로마서 8:26-27).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십니다 (고린도전서 12:7-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제 삼의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위로자와 상담사로 일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26; 15:26).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질문: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대답: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두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이 두 가지 사항에 거리낌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구하는 바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뜻과 어긋나거나 당신의 기다림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이 알려주기를 원합니다. 일할 곳은 어디이고, 어디서 살고,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주시는 일은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은 말합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단 하나 우리가 선택하지 않기를 원하는 결정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결정을 내리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고, 진심으로 그분의 뜻만을 소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망을 당신의 마음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핵심은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즉 성경은 당신의 소망이 성경말씀과 어긋나지 않고 또한 당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당신의 소망을 따라 결정을 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분명 그분의 뜻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질문: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답: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점차 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갈라디아서 5:16-25에서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에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모든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소유하였지만 또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는 육체를 따르기보다는 우리 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동에 따르기 위한 선택을 말합니다.

성령이 한 신자의 삶 가운데 가져오는 변화는 베드로의 삶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 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해진 후 오순절 날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감추거나 억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말한대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할 때 (에베소서 5:18-21)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집니까? 무엇보다도 구약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개인을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그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등).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채우신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두번째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알려주고 옳은 길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며 그 길을 계속 가도록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하듯이 말씀은 살아있고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죄에 대한 문제를 극복시킵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에서 말합니다. 또 여호수와는 그의 대적을 이기는 (현재 우리의 영적 전쟁에 대한 비유) 성공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암송하여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배우게 됩니다. 그는 대적과의 싸움에 임하지 않을 때에도 이를 준행하였고, 이는 또한 약속된 땅을 위한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 준 열쇠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수단이자 자원 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가거나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거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우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삶에 적용하지 않고, 드러내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주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만 보면 식욕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 때 일주일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섭취하거나 (사실 건강한 신자가 되기 위해 결코 소화시키지도 않습니다) 혹은 말씀을 받아 먹기는 하나 그것을 묵상하여 충분한 영적 영양분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매일마다 성경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면 그리고 성령이 당신 마음에 감동 주시는 말씀을 암기하는 습관에 베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런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짧은 감상문을 만드시길 권합니다.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은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세요. 하나님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기록하세요. 성경은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에베소서 6:17), 영적전쟁에 임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신갑주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에베소서 6:12-18).

세번째 수단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다른 근본적인 자원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등이 있습니다만 초기 교회처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3:1; 4:31; 6:4; 13:1-3 등). 바울은 그가 사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또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그의 구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에베소서 6:18)!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 우리삶 가운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냐구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깨우시고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당신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어하나 몸이 따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필요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7). 기도는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15).

네번째 수단은 교회, 즉 믿는자들과의 친교 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실 때 두 명씩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선교 여행을 보면 한 사람씩 가지 않고 둘 이상의 단체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의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데 함께 시간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24-25). 또 서로 죄를 고백하라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6). 지혜로운 말씀의 구약에서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를 빛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27:17). 다수는 단수보다 힘이 있습니다 (전도서 4:11-12).

몇몇 크리스챤들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위해서는 책임있는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엄청난 이득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고,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흔한일 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책임있는 파트너 혹은 집단을 가지면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어떤 때는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자원들을 사용할 때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을 견딜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



질문: 나는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

대답:
자살을 통하여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당신이 지금 그러시다면 체념이나 절망 등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같거나 더 이상 나아질만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인생은 정말이지 살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여기서 잠깐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의 역할을 담당 하시도록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럼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7). 아마 당신이 과거에 가졌던 거절감이나 자포자기에서 온 상처들이 이 말씀을 가로막고 있었을 겁니다. 그것들은 자기연민, 분노, 쓰라림, 복수심, 지나친 두려움을 가져왔고, 또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들을 일으켜 왔습니다.

왜 자살하면 안되는 걸까요? 친구여, 얼마나 나쁜 일들이 당신의 삶 가운데 일어나든지 간에 당신이 그 절망의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기다리시는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엄청난 빛 가운데 나오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희망입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받았던 거절감과 모욕감을 누구보다도 겪으신 분입니다. 이사야 53:2-6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에 대해 말하기를 모두에게 “경멸당하고 거절받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의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로인해 찔리고 상처받고 뭉개졌습니다. 그가 받은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구여,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인내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무거운 죄책감에 묶여 있든지 간에 당신이 겸손히 예수를 구세주로서 받아들인다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시편 50:15). 예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선택된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도 끔찍한 죄를 지은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했다거나 (모세), 간음을 했다거나 (다윗 왕),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했던 자도 (사도 바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 받았고 주 안에서 풍성한 새 삶을 누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왜 자살하면 안되냐구요? 친구여, 하나님은 부서지고 망가진 것들 즉 지금 당신의 삶, 당신이 자살로 끝내려는 삶을 고치시려고 바로 당신 옆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1:1-3 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리고 그가 당신의 기쁨과 가치를 회복시키시도록 당신의 삶 가운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는 당신이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을 지탱하기 위한 새 영혼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다친 마음은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2, 15-17).

주를 당신의 구원자와 안내자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가 당신의 생각과 걸음을, 하루에 하나씩,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이사야 33:6). 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고민할 수 있으나 이제 당신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 (잠언 18:24)입니다. 당신의 결단의 시간에 주 예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길 원하신다면 당신 마음에 이렇게 말하세요. “하나님, 제 삶에 당신이 있으셔야 합니다. 저의 모든 과거를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저를 정결케 하시고, 치유하시고, 제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세요.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저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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