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



질문: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

대답:
일단 한 번 받은 구원은 불변하는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게 될 때부터 영원히 견고한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성경의 수 많은 구절들이 증거합니다.

1. 로마서 8:30은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에 계신 그 분의 품안에서 영화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미 이렇게 계획했기 때문에 한 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일단 사람이 한번 의롭게 되면 그의 구원은 보장됩니다. 즉 하늘에서 이미 영화롭게 된 것처럼 보장됩니다.

2. 바울은 로마서 8:33-34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고소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변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리스도 즉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분만이 정죄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의 대변인이자 심판자 되십니다.

3. 신자들은 그들이 믿을 때 (요한복음 3:3; 디도서 3:5) 거듭(중생)납니다. 한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잃으려면 다시 거듭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거듭난 새 생명이 다시 빼앗기는 경우는 보이지 않습니다.

4. 성령께서 모든 신자 안에 거하여 계시고 (요한복음 14:17; 로마서 8:9) 또 모든 신자를 세례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 고로 다시 구원이 없어지려면 성령이 거하지 않게 되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5. 요한복음 3:15은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가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받고 내일 잃게 된다면 그 생명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잃는다면 성경에 있는 영생에 대한 약속은 오류가 됩니다. (f)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이 말씀에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기억하세요. 당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또한 당신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으면 항상 구원 받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영원히 보장됩니다!

영원한 구원은 성경적인가?



질문: 영원한 구원은 성경적인가?

대답: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알게 될 때,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됩니다. 유다서 24절에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한 신자가 넘어지지 않게 붙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런 영원한 보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 결과이지,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잘 관리한 결과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29). 예수님과 하나님 두 분 모두 우리를 꽉 붙들고 계신데, 어느 누가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님의 품에서 갈라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4:30에 믿는 자들은 구원의 날을 위해 인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지 못한다면 인침은 구원의 날까지 효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배교하거나, 불신하는 날 전까지만 효력을 지닐 것입니다. 요한복음 3:15-16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가질 것이라 합니다. 한 때는 영생을 약속 받고, 또 다른 때는 뺏긴다면 이는 처음부터 영생이 아닐 것입니다. 영원한 보장이 거짓이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영생에 대한 약속은 잘못 되었을 것입니다.

영생의 보장에 관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로마서 8:38-39절에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원한 보장은 그리스도가 이미 값을 지불하신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이며, 성령님에 의해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죽음 후에는 어떻게 될까?



질문: 죽음 후에는 어떻게 될까?

대답:
죽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혹은 지옥으로 보내질 심판을 기다리며 잠에 들어있을 거라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 후에 바로 심판 받고 영원한 목적지로 보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죽음 후에는 영혼만이 임시적인 천국에서 부활과 심판을 기다린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죽음 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첫째, 성경은 믿는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으므로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죽음후에는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 18, 36). 믿는 자들에게 죽음이란 “육신에서 멀어지고 주님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것” 을 뜻합니다 (고린도후서 5:6-8; 빌립보서 1:23). 그러나 고린도전서 15:50-54과 데살로니가전서 4:13-17은 부활과 찬미된 육신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믿는자들이 죽은 후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부활의 목적은 무엇에 있는 걸까요? 죽음 후에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 육신은 무덤에서 잠들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부활은 육신이 다시 일어나 찬미되고 영혼과 다시 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결합된 육신과 영은 영원한 새 천국 그리고 새 땅의 재산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죽음 후에 영원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을 기다리는 방식은 믿는자들과 비슷합니다. 죽음 후에 부활과 심판을 기다린 후 마지막에는 영원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2-23에서는 부자가 죽음후에 괴로워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에서는 믿지않는 자들은 죽음 후 부활하게 되고 왕위에서 심판 받게 될 것이며 후에는 불못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음 후 바로 지옥에 가지는 않지만 심판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불못에 던져지지 않는 다고 해서 기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자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누가복음 16:24).

그러므로 죽음 후에 사람은 임시적인 천국 혹은 지옥에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임시 영역 후에는 최후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의 숙명은 바뀌지 않을 것 입니다. 믿는 자들은 최후에 새 천국과 새 땅을 향한 문턱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 믿지않는 자들은 최후에 불못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이 것들이 바로 그들의 마지막 영원한 목적지 입니다. 즉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6; 요한복음 3:36).

성경, 크리스챤, 자살? 자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자살에 관한 크리스챤의 관점은? 성경은 자살에 대해 뭐라 말하고 있는가?

대답:
성경은 자살한 여섯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사사기 9:54), 사울(사무엘상 31:4), 사울의 시종(사무엘하 17:23), 시므리(열왕기상 16:18), 그리고 유다(마태복음 27:5). 그 중 다섯명은 사악하고 죄된 사람들(사울의 시종의 경우 구분되기 충분치 않았습니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손의 경우도 자살의 한 예로 보고 있습니다(사사기 16:26-31). 그러나 삼손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자살도 살인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살인하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죽음을 결정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자살행위는 사람이 천국으로 갈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자가 자살을 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한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살 한 사람은 자살이 아닌 구원을 거부한 이유로 최후에는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챤의 자살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3:16)). 성경에 따르면 크리스챤은 자신이 영원한 삶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는다고 합니다(요한일서 5:13).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크리스챤을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로마서 8:38-39).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크리스챤을 갈라놓을 수 없기에 자살행위도 그 중 하나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크리스챤을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므로 영적 공격, 연약함, 자살행위등을 겪는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도 그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사하여진 죄입니다.

자살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죄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자살은 살인이며, 언제나 그릇된 행동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챤의 자상행위는 의혹을 가지게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살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크리스챤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음의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입니다. 자살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린도전서 3:15절은 자살한 크리스챤에게는 무슨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묘사한 글로써 적절 할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것 같으리라.”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대답: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가장 난해한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해하여 설명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아버지도 하나님,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가 진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한 존재로서 한 분의 하나님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서술할 때 쓰였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세 명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이 용어 사용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공존하시는 세 인격체로 구성된 한 분의 하나님”보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니까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개념이 성경에 나와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 몇 성경 구절을 살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 봅니다.

1. 오직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2. 삼위일체는 세 인격으로 구성됩니다 (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구약의 구절에 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1에는 복수 명사 “엘로힘”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그리고 이사야 6:8에는 복수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과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둘 이상을 가르킵니다. 영어는 오직 두 가지 형태, 단수와 복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쌍은 2개 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세 형태가 있습니다. 즉 단수, 쌍, 그리고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의 쌍은 눈, 귀, 그리고 손과 같이 쌍을 가진 것에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과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둘 보다 많은 즉 셋 이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천부, 아들, 성령).

이사야 48:16 과 61:1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1:1을 누가복음 4:14-19과 비교하여 보세요. 마태복음 3:16-17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천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할 때, 성령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 와 고린도후서 13:14은 삼위일체 가운데 구별되는 세 인격체를 말하는 예가 됩니다.

3. 또 다른 많은 구절들도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구별합니다. 구약에서 “주 (LORD)” 는 “주 (Lord)” 와 구별됩니다 (창세기 19:24; 호세아 1:4). 전자의 주는 “아들”을 소유합니다 (시편 2:7, 12; 잠언 30:2-4). 영도 또한 “주 (LORD, 민수기 27:18)” 와 “하나님 (God, 시편 51: 10-12)” 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성자 예수님도 천부 아버지 (시편45:6-7; 히브리서 1:8-9)와 구별됩니다. 신약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언급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나 성령님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로 언급한 또 다른 구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계시는 다른 인격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각 인격체는 하나님 되십니다 (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 14; 로마서 9:5;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5. 삼위일체 내 상호 종속, 의존: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께 속합니다. 이 삼위일체 내의 관계는 각 인격의 독립된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아들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20:21; 요한일서 4:14,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6. 삼위일체 각 인격체의 역할: 하나님 아버지는 이하 열거한 일들의 궁극적인 자원 혹은 원천이 되십니다. 가) 우주 (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나) 계시 (요한계시록 1:1); 3) 구원 (요한복음 3:16-17); 4)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과업 (요한복음 5:17; 14:10).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하여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 창조와 우주 경영 (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1:3; 골로새서 1:16-17). 나) 계시 (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다) 구원 (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그의 매개체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창조와 우주 경영 (창세기 1:2; 욥 26:13; 시편 104:30). 나) 계시 (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다) 구원 (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라) 예수님의 업적 (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내셨습니다.

사실 어떤 뛰어난 묘사도 삼위일체를 적당히 표현해 내기 힘듭니다. 달걀을 예로 들자면, 달걀 껍질, 흰자, 노란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달걀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한 부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 물로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 증기, 얼음은 물의 다른 형체일 뿐이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하나님의 단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각각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모든 비유가 삼위일체의 모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비유로 온전히 묘사될 수 있겠습니까?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사실에 초점을 두도록 합니다.” (로마서 11:33-34)

세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질문: 세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대답: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의 세례는 한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바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 묻힘, 부활과 동일시되어 설명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큰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3-4).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장사되는 것을, 그리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례 받기 전에 요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세례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신뢰해야 하고, (2) 세례가 뜻하는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구세주로 알고,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순종의 첫 단추임을 이해하고, 세례 받기를 소망한다면, 세례를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공표 즉 순종의 첫 발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는 중요합니다. 즉 그리스도에 둔 믿음을, 그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에 참여한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란? 성경은 사역하는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란? 성경은 사역하는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아마 여성 사역자 주제 만큼 오늘날 교회에서 더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이렇게 대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여자는 목사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성경도 또한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 설교자의 섬김과 여성들의 사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차별대우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하셨습니다(디모데전서 2:11-12).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각각 달리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창조된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고 죄가 세상에 들어 오게 된 연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13-14).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여성들이 영적인 가르침으로 섬기는 데 있어서 남성 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사로서의 섬김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영적인 권위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여성 사역 제한을 반대하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막는 이유는 1세기의 여성들은 교육받은 자가 특별히 적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4어디에서도 교육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대다수 예수의 제자들은 자격미달입니다. 둘째,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가르치는 사역에서 제외시켰다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에베소 도시는 그리스 로마가 섬겼던 신, 아르테미스의 성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예배는 여성이 주도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어디에서도 아르테미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바울도 아르테미스 숭배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전서 2:11-12을 통해 제한시키지 않았습니다.

셋째, 바울이 단지 남편과 아내를 상대로 여성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남성 대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어는 남편과 아내만을 뜻 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뜻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어가 8절에서 10절에서도 쓰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결혼한 남편들에게만 얘기하는 것입니까 (8절)? 단정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결혼한 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9절-10절). 물론 아닙니다. 8절부터 10절은 분명히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에서도 대상이 갑자기 남편과 아내들로 전환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의는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해석할 때 성경에서 리더쉽의 자리에 있었던 미리암, 드보라, 훌다, 프리실라, 뵈뵈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보라의 경우, 그녀는 13명의 사사중에 유일한 여성 사사였습니다. 훌다의 경우, 그녀는 성경에서 말 하는 13명의 선지자 중에 유일한 여성 선지자 였습니다. 미리암의 리더쉽은 그녀가 모세와 아론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아달리아와 이세벨이나 그들은 거룩한 여성 리더쉽을 거의 보이지 못했습니다. 중요한건 구약에서 여자의 권위는 논 할 문제로 적절치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의 새로운 예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이스라엘이나 구약체제가 아닌 교회의 권위를 포함합니다.

비슷한 논쟁으로는 신약에 나오는 프리실라와 아퀼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장에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로 묘사됩니다. 프리실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그녀가 남편보다 사역을 훨씬 뛰어나게 감당한 한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디모데전서 2:11-14절에 대립되는 사역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효과있게 전달함으로 그를 제자로 양육 했습니다 (사도행전 18:26).

로마서 16:1에서 뵈뵈를 “종”보다는 “여집사”로 여겼지만 그녀가 교회의 교사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집사들이 아닌 장로들에게 주어진 자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장로/주교/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 “믿음이 좋은 자녀를 둔 남자” 그리고 “존경할 만한 남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와 디도서 1:6-9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특별히 장로/주교/집사들을 언급하는 데 쓰였습니다.

디모데전서 2:11-14의 구조는 아주 확실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13절은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남성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은 여자였지 아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질서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과 교회에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5:22-33).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목회자 사역과 남성에게 영적 권위 사용의 부적합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은 쉽게 속기 때문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자가 더 쉽게 속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잘 속아 넘어가는) 가르치고 또 다른 여성(더 잘 속는다고 가정된)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브는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남자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여성은 대접, 동정, 긍휼, 가르침, 그리고 돕는 은사에 강합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빼놓고는 여성이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5).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하나님은 교회에서 오직 남자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수준 높은 교사이거나 여성이 남자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교회를 이렇게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남성이 그들의 삶과 언어사용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조금 덜 권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다른 여성을 가르치라고 되어있습니다 (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의 아이들 교육에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경우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자연히 목사나 설교자로 활동하는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여성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성에게 더 유리하게 만드신 은사들에 전력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질문: 십일조 헌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대답:
십일조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헌금에 대한 성경의 권고를 따르기 꺼려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십일조나 나눔은 원래 기쁨과 축복으로 우러나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십일조는 원래 구약의 개념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상의 요구였는데,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은 각자가 벌어들인 모든 소유 중에 10%를 성전에 바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레위기 27:30; 민수기 18:26; 신명기 14:24; 고린도후서 31:5). 구약에는 십일조의 배 즉 23.3%를 필수적으로 생각 했습니다. 당시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세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렇게 율법적인 십일조 제도를 명령하거나 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바울은 신자들이 자신 소득의 일부분을 구별해서 교회를 도우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2).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의 수입을 따로 떼어놓으라고 언급한 곳은 전혀 없고 “얻은 대로 저축하라” 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2). 현대의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구약에 있는 10% 수치를 적용해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어야 하는 최소한의 정도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묶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 중에 할 수 있는 만큼을 기여하면 됩니다. 때때로 이는 십일조를 넘는 금액일 수도 있고, 못 미치는 금액일 수도 있습니다. 각 신자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유동성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또 한다면 어느 정도를 나누어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모든 십일조와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태도로 드려져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이혼과 재혼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질문: 이혼과 재혼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대답:
이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성경의 말라기 2:16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일평생의 헌신으로 계획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찌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9:6). 죄성을 지닌 두 사람의 결혼이기에 그들의 죄성이 이혼을 가져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혼당한 사람 특히 이혼당한 여자측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을 두셨습니다 (신명기 24:1-4).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진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8).

이혼과 재혼에 대한 논쟁은 마태복음 5:32 와 19:9의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진전됩니다. 즉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이혼과 재혼이 고려되는 예외 상황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번역가들이 이 예외가 되는 경우를 약혼 기간 동안의 외도로 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서는 약혼한 남녀도 이미 결혼한 부부로 간주하기 때문에 약혼기간 동안의 부도덕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번역한 “혼인상의 불충”은 모든 모양의 성적 부도덕을 뜻할 수 있습니다. 간음, 매춘 모두를 뜻할 수 있습니다. 고로 예수께서는 성적 부도덕이 사유가 되는 경우는 이혼이 허가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적인 관계는 “둘이 한 몸을 이룰찌라” (창세기 2:24; 마태복음 19:5; 에베소서 5:31)는 말씀에도 있듯이 결혼의 끈을 잇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혼인관계 이외의 성 관계로 그 끈을 끊는 것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재혼도 고려하셨습니다. “다른 데 장가드는” (마태복음 19:9) 문구는 어떻게 해석되던지 간에 이혼과 재혼이 가능한 예외의 경우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절을 지킨 쪽만 재혼이 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재혼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혼 후 재혼은 성적 부도덕을 범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닌, 피해를 당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긍휼로 봅니다. 죄를 지은 측도 재혼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바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15은 또 다른 예외의 경우를 말합니다. 즉 불신자인 배우자가 믿는 사람과 이혼을 원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재혼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오직 신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길 원할 경우 혼인관계 유지에 묶이지 않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나 배우자 학대나 아동 학대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추측에 근거한 말씀 해석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때로 이혼이 허락되는 예외의 경우를 두고 끝이 없는 논쟁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예외의 경우를 해석할 때,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꼭 이혼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간음을 범한 부부도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용서하고, 둘의 결혼이 다시 견고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죄를 용서하셨기에, 간음의 죄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2). 그러나 많은 경우에 배우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성적인 부도덕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경우 마태복음 19:9이 적용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혼 후에 너무 급히 재혼을 합니다만 하나님은 그들이 독신으로 남아있기를 원하십니다. 독신으로 머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분산되지 않기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32-35). 이혼 후 재혼이 가능하지만, 꼭 재혼만이 유일한 선택사항은 아닙니다.

크리스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혼율이 불신자 가정만큼 높아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낙심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혼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또 화해와 용서가 믿는 자들의 모습이 되야 한다고 성경은 무수히 얘기합니다 (누가복음 11:4; 에베소서 4:3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이혼이 불가피한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렇기에 이혼하거나 재혼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덜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경우가 마태복음 19:9에 있는 예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찬들의 죄악된 불순종을 사용하셔서 선한 일을 이루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오늘날도 이 은사가 적용되는가?



질문: 방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대답:
방언은 성령 강림절 (사도행전 2:1-4)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 사람들의 말로 전달했습니다.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그리스어로 방언은 “언어”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서 바울은 놀라운 은사들을 소개하면서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14:6). 사도 바울과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의 성격을 보면, 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되어 유익이 되나, 그 방언이 외국어인 사람들에게는 방언이 번역되지 않는 이상 방언은 무용한 것이 됩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 (고린도전서 12:30)은 그 방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그 방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그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이 뜻하는 바를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고린도전서 14:13).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14:19).

그럼 오늘날은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얘기합니까? 고린도전서 13:8을 보면 방언은 결국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13:10에 있는 “온전함”이 올 때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과 지식의 말씀이 “그칠 것이다”와 방언이 “그치게 된다” 가 다른 시제로 표현되었음을 지적하고, 방언은 예언과 달리 그 “온전함”이 오기 전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아닙니다. 또 어떤 이는 아사야 28:11과 요엘 2:28-29를 증거로 들면서 방언은 다사올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4:22에서 방언은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사인이 된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거부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미 심판하셨기에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방언의 은사는 그 때 멈추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런 해석도 불가능하지 않지만, 방언은 멈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방언이 이미 그쳤다는 성경말씀도 없습니다.

방언이 오늘날 교회에서 유용한 것이라면, 성경 말씀에 부합하여, 실제적이며 지식의 언어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0). 또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2). 또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신 말씀과 부합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7-28). 그리고 고린도전서 14:33의 말씀과도 상충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데 있어 주권적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11). 상상해 보십시오. 선교사가 외국어를 학원에 가서 배우지 않고도, 성령에 의해 즉석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약성경처럼 방언이 쓰인다면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의 모습이 위에서 언급한 성경 말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볼 때, 방언의 은사는 이미 그쳤거나 혹은 아주 희소하게 쓰인다고 결론 내릴 수 있겠습니다.

타인종간 결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나?



질문: 타인종간 결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나?

대답: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다른 민족들과의 혼인을 금합니다 (신명기 7:3-4).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과의 결혼으로 자신들이 섬기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좀 다른 차원에서이지만 유사한 원리가 신약에도 나타납니다. “너희는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린도후서 6:14). 즉 이스라엘 민족(유일한 참된 하나님을 믿는) 들이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도록 주의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 (유일한 참된 하나님을 믿는) 들도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도록 명령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성경은 타인종간의 결혼이 틀리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마틴 루터 왕은 사람이 자신의 인격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지 피부색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챤 삶 가운데에는 인종에 따른 차별대우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2:1-10). 크리스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기준은 내가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자인지 알아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3-5). 배우자를 고르는 데 있어 성경의 기준은 그리스도에 둔 믿음이지 피부색이 아닙니다. 고로 타인종간의 결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 판단력,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 문제가 되겠습니다.

타인종간의 결혼을 고려해야 될 단 한 가지 이유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힘든 시간을 지나쳐야 하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많은 국제결혼을 한 부부들이 인종차별이나 무시를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당합니다. 국제결혼 한 몇몇 커플들 중에는 그들의 자녀가 부모나 친척들과 피부색이 다를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국제결혼을 하려고 결심한 부부들은 이런 사항들을 심사 숙고하여 아이들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의 결혼에 있어 성경이 제한하는 것은 배우자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속한 자인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문신/ 바디피어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성경은 문신/ 바디피어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28).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은 (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문신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신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문신과 바디 피어싱에 관해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양심적으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축복해 달라고 구할 수 있는지 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사용하시라고 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성경은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금하는 명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믿을 만한 이유도 주지 않습니다.

또 고려할 사항은 단정함입니다. 성경은 옷을 단정하게 차릴 것을 지적합니다 (디모데전서 2:9). 단정하게 옷을 입었는지 알아보려면 옷으로 가려야 될 몸을 적절히 가렸는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사실 단정함의 근본적인 뜻은 당신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적절히 입은 사람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습니다.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대부분 사람의 주의를 끕니다. 이런 면에서 문신과 바디 피어싱은 단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원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연루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구속되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19-20에 문신이나 바디 피어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의를 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던지 이 진리는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면, 문신이나 바이 피어싱으로 우리 몸을 치장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허락”이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혼 전 성관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혼전 성교란?



질문: 결혼 전 성관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혼전 성교란?

대답:
성경에 결혼전의 성관계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도 쓰여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간통과 음란함을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는 것이 성적으로 부도덕 한 것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7:2에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2은 사람들이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고 결혼 외에 부도덕 적인 성관계를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결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이 확실하게 결혼 전 성관계는 음란 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됩니다. 결혼전 성관계는 성경적으로 음란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류의 성적인 부도덕과 더불어 혼전 성관계도 죄로 간주됩니다 (사도행전 15:20; 고린도전서 5:1; 6:13, 18; 7:2; 10:8; 고린도후서 12:21; 갈라디아서 5:19; 에베소서 5:3;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4:3; 유다서 7). 성경은 결혼 전 금욕할 것을 권합니다. 결혼 전 성관계는 간음이나 다른 모양의 성적 부도덕과 동일하게 잘못 된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관계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적인 관계입니다 (히브리서 13:4).

결혼 전 성관계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일반적인 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성관계의 생명을 잉태하는 면을 무시하고 오락적인 면에만 치중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성관계를 즐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혼관계로 맺어진 한 남자와 한 여자 즉 부부관계에서만 적용됩니다. 솔로모의 노래나 다른 여러가지의 성경 구절(예를들어 잠언 5:19)에 성관계의 기쁨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의 주요 목적은 즐김보다는 생명의 재생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의 성관계는 더더욱 잘 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전 성관계를 막으시는 것은 우리의 즐김을 뺏으려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임신에서 보호하고 준비되지 않은 부모가 아이들을 맡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고안한 대로 성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더 나은 세상이 될지 상상해 보세요. 성병, 미혼모, 원하지 않는 임신, 낙태 등이 모두 감소될 것입니다. 혼전 성관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금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욕은 생명을 살리고, 아기를 보호하고, 성관계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가?



질문: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가?

대답:
공룡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느냐는 주제는 기독인들이 지구의 나이, 창세기 해설, 그리고 우리 주위의 물증 해석 방법을 다룰 때 거론되는 한 사항입니다. 성경이 공룡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은 공룡은 최초의 인간이 지구를 발로 밟기 몇 백만 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했던 사람은 살아있는 공룡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공룡을 언급했다고 주장하는 측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공룡이라는 단어 대신에 tanniyn (히브리어) 을 사용했고, 영어 성경은 이를 바다 괴물이나 뱀 그리고 대개 용으로 해석한 것으로 봅니다. Tanniyn은 거대한 파충류의 한 종류로 보여지며, 구약에서는 육지와 바다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약 30차례 언급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거대한 파충류로 공룡을 묘사하는 것 이외에 몇 다른 용어를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Behemoth는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 가장 강력하다고 불려지는 데, 그 꼬리가 백향목과 같이 두껍다고 했습니다 (욥 40:15). 어떤 성경학자들은 Behemoth를 코끼리나 하마로 해석합니다만, 코끼리나 하마의 꼬리는 매우 얇아 백향목에 비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브라키오소스와 디플로도쿠스 같은 공룡은 백향목과 같이 두꺼운 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은 거대한 파충류를 새긴 조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미에서 발견되는 피트로글립스 조각이나 아주 작은 진흙으로 만든 조각들은 현대의 공룡조각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다. 또 남미의 있는 한 바위 조각은 디플로도쿠스와 같은 형체의 공룡을 탄 사람을 새기고 있고, 또 놀랍게도 트리세라톱스류, 프테로닥틸류 그리고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류와 유사한 형태를 새긴 조각들도 있습니다. 또, 로마식 모자이크나 마야족의 자기류, 그리고 바빌로니아 도시 성벽들을 보면 인간의 공룡에 대한 흥미는 문화와 지역을 초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마르코 폴로의 한 소설 (Il Millone)을 보면 보물을 소유한 짐승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현대의 관점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기에 매우 어렵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 밖에 공룡과 사람이 공존했음을 보이는 충분한 인류학적, 역사적 증거 외에 또 다른 물증이 발견되었는데, 북미와 중서부 아시아 지역에서 인간과 공룡의 발자국이 같이 찍혀 있는 화석이 그것입니다.

그럼 성경은 공룡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가지의 답을 제시하기에는 어렵고, 각각의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문자로 설명했다면 그 결과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또한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는 사실도 인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면 공룡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적 변화의 문제라던지 사람에게 사냥을 당했을 거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천국에 가는가?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가?



질문: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천국에 가는가?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가?

대답:
성경에 애완동물이나 동물도 영혼이 있는지 또는 천국에 가는지 특별히 알리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성경에 나타난 원리들을 가지고 이 주제들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고 (창세기 2:7), 동물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창세기 1:30; 6:17; 7:15, 22). 주요 차이점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창세기 1:26-27),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다는 뜻은 하나님과 같이 마음, 감정, 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 그리고 죽음 후에도 계속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완동물이나 동물이 영혼이나 불멸의 면모를 지녔다 하더라도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하등한 질이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죽음 후에 영혼을 지니지 않습니다.

또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동물을 창세기에서 그의 대창조 과정의 한 부분으로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노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1:25). 그러므로 새 땅에 동물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적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천년왕국 기간 동안 동물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사야 11:6; 65:25). 이들 중에 내가 가진 애완동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갈 때 이 문제에 대한 그분의 결정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도박은 죄인가? 성경은 도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질문: 도박은 죄인가? 성경은 도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대답:
성경은 도박, 내기, 복권을 특별히 죄로 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0; 히브리서 13:5). 또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될 생각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잠언 13:11; 23:5; 전도서 5:10). 도박은 대부분이 돈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도박의 잘못된 점은 무엇일까? 도박은 다루기 힘든 화제입니다. 가끔 지나치지 않게 하는 도박은 돈을 낭비하는 것 이지만 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불필요하게 비싼 음식을 먹을 경우나, 살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구입하곤 합니다. 도박은 그러한 일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박의 행위를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낭비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잉여로 남은 돈은 미래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저축되어야 하지 도박으로 없애면 안됩니다.

성경은 도박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운”이나 “기회”라는 단어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예를들어 레위기 에서는 추첨을 통해 재물로 드릴 양과 속죄양을 골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추첨을 통해 다양한 부족에게 땅을 할당 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느혜미야는 추첨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에 살 사람들을 결정했습니다. 제자들은 추첨을 통해 유다의 후계자를 결정했습니다. 잠언 16:33은 말합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성경은 카지노나 복권에 대해 뭐라고 말하려 했을까요? 카지노는 도박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돈을 벌어내는 시장입니다. 그들은 가끔 값싼 술이나 공짜로 술을 제공합니다. 그로 인해 술에 취하게 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카지노 안의 모든 것은 큰 돈을 가져가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공허한 즐거움만 빼고 말입니다. 빠른 시간내로 부자가 되는 것은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 됩니다. 미소한 확률을 쫓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을 파멸로 이끕니다.

복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복권이나 도박으로 얻은 이익으로 교회나 다른 선한 일에 쓰겠다고 합니다. 동기는 좋으나, 도박에서 딴 돈으로 신성한 목적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조사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복권 당첨자들의 경제 사정이 당첨된 후가 당첨 전보다 훨씬 나쁘다고 합니다. 설령 경제사정이 좋아진 사람도 선한 일에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돈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잠언 13:11은 말합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하나님은 정직한 방법을 통해 교회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약물이나 은행절도로 얻은 돈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겠습니까? 빈곤한 자가 부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훔친 돈은 필요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6:10 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또 히브리서 13:5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또 마태복음 6:24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성경, 음주, 크리스챤? 술을 마시는 것은 죄가 되는가?



질문: 술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 하는가? 크리스챤이 음주하는 것은 죄가 되는가?

대답:
몇가지 성경 구절들은 음주를 멀리하라고 권고 합니다 (레위기 10:9; 민수기 6:3; 신명기 14:26; 29:6; 사사기 13:4,7,14; 잠언 20:1; 31:4,6; 이사야 5:11,22; 24:9; 28:7; 29:9; 56:12;).하지만 이 말씀은 크리스챤에게서 맥주, 포도주, 그 밖의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들을 완전히 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은 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전도서 9:7은 말합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시편 104:14-15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모스 9:14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마시는 와인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5:1은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리스챤에게 피하라 하신것은 술에 취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성경은 술취함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들을 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9-35). 또한 어떤 것도 자신의 육체를 다스리게 허락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12; 베드로후서 2:19).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은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의 양심을 거슬려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8:9-13). 이런 원리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음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는 심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경우에 따라 포도주를 즐기셨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1-11; 마태복음 26:29). 신약성경의 시대에는 물이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처럼 정화시설이 없었기에, 물에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이물질들이 가득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제 3세계국가의 물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 물보다 오염이 덜 된 포도주 (혹은 포도주스)를 마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그만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물이 디모데에게 위장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어로 와인은 그저 평범한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 와인은 적당히 발효된 것이지, 오늘날의 알코올을 함량할 정도는 아닙니다. 포도 주스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오늘날의 포도주와 같은 농도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맥주, 와인이나 그 밖의 알코올을 함량한 음료를 마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알코올 그 자체는 죄로 오염된 것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삼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고린도전서 6:12).

작은량의 알코올 섭취는 해롭거나 중독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들은 적은 양의 레드와인을 섭취하는 것은 건강, 특히 심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알코올을 조금만 섭취하는 것은 크리스챤의 자유입니다. 취하거나 중독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알코올의 영향, 알코올 과다 섭취의 유혹,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등을 볼때 크리스챤으로써는 음주를 삼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의 3일일간 어디에 계셨을까?



질문: 예수님의 3일일간 어디에 계셨을까?

대답:
베드로전서 3:18-19에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18절의 “영으로는”는 “육체로는”과 동일한 어문구조인 것을 볼 때, “영”과 “육체”를 동일한 차원 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영은 그리스도의 육체와 영입니다. “영으로 다시 사셨다”는 구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실 때. 그의 인간의 영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되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46). 여기서 육체와 영은 마태복음 27:41과 로마서 1:3-4절에 있는 인간차원에서의 육체와 영의 대립으로 봐야지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죄 대속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새롭게 한 주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18-22는 그리스도의 고난 (18절)이 그의 영광 (22절)임을 보여줍니다. 오직 베드로만 고난과 영광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말합니다. 19절의 “전파하시다” 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복음을 전파하다 할 때 동사와 틀립니다. 문자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때 육체도 죽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영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영은 다시 살아 하나님 아버지께로 속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예수께서는 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특별한 선포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사람들을 “혼 (souls)”으로 명하고 “영 (spirits)” 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 “영”은 대체로 사람이 아닌 천사나 악령들을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도 이런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지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헤다스”에 가셨다고 나와 있으나, 헤다스는 지옥이 아닙니다. 헤다스는 죽은 자들의 영역 즉 죽은 자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머무는 일시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NASB나 NIV번역판의 요한계시록 20:11-15을 보면 이 두 영역의 차이점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지옥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마지막 장소이자 영원한 곳입니다만 헤다스는 일시적 장소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기시고 죽으셨고,죽음과 부활 사이의 한 시점에서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적 존재 (아마 타락한 천사; 유다서 6절을 참조) 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영적 존재는 노아의 홍수 시점 이전과 어느 정도 관련됩니다. 20절에 좀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님이 전달한 내용을 말하지 않지만, 구원에 대한 소식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6). 그렇다면 사단과 사단이 부리는 영들에 대한 승리에 대한 내용이었을 겁니다 (베드로전서 3:22; 골로새서 2:15). 또한 에베소서 4:8-10 은 그리스도가 낙원에 가셨고 (누가복음 16:20; 23:43), 그의 죽음 전에 믿었던 자들을 데리고 천국에 가셨음을 알립니다. 이 구절이 일어난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바는 없지만,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이를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는 구절이 뜻하는 바로 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전체적으로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 삼일 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만, 타락한 천사들과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예수님의 승리를 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두 번째 구원의 기회를 주시지는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듯이 우리의 죽음 후에는 심판이지 (히브리서 9:27),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실제 정확한 답은 없습니다. 아마 이 난제는 우리의 영광을 볼 때에나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가인의 여자 형제 중 하나였을까?



질문: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그의 여자 형제였을까?

대답:
가인의 아내가 누구였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가인의 여동생 혹은 조카 혹은 조카딸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의 나이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4:8). 그들 모두 농부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자신의 가정을 가진 장성한 성인으로 보여집니다. 아벨이 죽었던 그 시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는 가인과 아벨외에도 많았습니다. 후에도 더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5:4). 특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낀 것으로 볼 때 (창세기 4:14) 많은 숫자의 자손들 즉 아마도 아담과 하와의 손자소녀, 혹은 증손자 증손녀의 존재를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의 아내 (창세기 4:17)는 아담과 하와의 딸이나 손녀 중 하나로 볼 수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는 그들끼리 서로 혼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근친결혼은 사람들의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 근친결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레위기 18:6-1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전자적 이상이 잘 일어납니다. 이는 동질의 유전자를 가진 두 사람이 (한 가족 내의 형제 자매) 같은 유전자적 결함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혈연의 두 사람은 같은 유전자적 결함을 가지기 힘듭니다. 인간의 유전자 코드는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전자 결함이 배가되고, 강화되고, 세대간에 계속 이어지면서 점진적으로 오염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유전자 결함도 지니지 않았기에 그들의 후손 처음 몇 세대는 현대의 우리보다 훨씬 나은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유전자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간의 근친결혼은 안전했다고 보여집니다.

동성연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성연애는 죄인가?



질문: 동성연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동성연애는 죄인가?

대답:
성경은 동성연애는 죄라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창세기 19:1-13; 레위기 18:22; 로마서 1:26-27; 고린도전서 6:9). 로마서 1:26-27에서 동성연애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한 결과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죄와 불신가운데 계속 머물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악하고 부패된 죄에 넘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무익하고 절망적인지 알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9은 말하길 동성연애를 범하는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을 특별히 따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죄 때문에 동성애자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4-27).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성연애의 죄는 사람이 선택한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폭력적인 사람이 있듯이 어떤 사람은 동성연애에 대해 더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욕망에 자신을 넘김으로 죄를 짓겠다는 것은 타당한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성적으로 잘 분노하고 격노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동성연애가 다른 죄보다 더 큰 죄라고는 다루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무례한 것입니다. 동성연애는 고린도전서 6:9-10에 나열된 많은 죄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모든 죄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간음한 자, 우상숭배자, 살인자, 절도범을 모두 용서하듯이 동성연애자도 용서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동성연애의 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이길 힘을 약속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고린도후서 5:17; 빌립보서 4:13).

자위행위,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죄인가?



질문: 자위행위,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죄인가?

대답:
성경은 자위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또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위행위에 관한 오난의 이야기를 다룬 성경 구절은 창세기 38:9-10 에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씨를 바닥에 뿌리는 것은 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것에 대해 명확이 말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난이 음행을 했다고 해서 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의 상속을 위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자위행위에 대한 것이 아닌 가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번째 구절은 자위행위가 죄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자주 쓰여진 구절로 마태복음 5:27-30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호색된 생각을 반대하셨고 말씀하시기를 “너의 오른손이 죄를 범하는 이유라면 잘라내어 버리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정확히 자위행위가 죄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위행위를 하게 되는 데까지의 행동 자체가 죄이므로 질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위행위는 호생된 생각, 성적 자극, 도색된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극복 된다면 자위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위행위에 대해 괴로움을 느낍니다.

몇가지 성경 구절은 자위행위에 관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에베소서 5:3은 말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자위행위가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의심이 간다면 포기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4:23). 나아가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구속되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 20). 이 진리는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던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원칙들을 볼 때, 자위행위는 성경에 근거해 확실히 죄입니다. 즉 자위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 부도덕의 모양이라도 피하라는 말씀에 거슬리고, 그리고 우리 몸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