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도 생활에 대한 질문들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질문: 기독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을까?

대답:
성경은 인간의 죄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점차 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수단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갈라디아서 5:16-25에서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에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모든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소유하였지만 또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는 육체를 따르기보다는 우리 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동에 따르기 위한 선택을 말합니다.

성령이 한 신자의 삶 가운데 가져오는 변화는 베드로의 삶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 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해진 후 오순절 날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감추거나 억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19에서 말한대로)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할 때 (에베소서 5:18-21)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집니까? 무엇보다도 구약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개인을 선택하시고 선택받은 그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등).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채우신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두번째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선한 일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알려주고 옳은 길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며 그 길을 계속 가도록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하듯이 말씀은 살아있고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죄에 대한 문제를 극복시킵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에서 말합니다. 또 여호수와는 그의 대적을 이기는 (현재 우리의 영적 전쟁에 대한 비유) 성공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암송하여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배우게 됩니다. 그는 대적과의 싸움에 임하지 않을 때에도 이를 준행하였고, 이는 또한 약속된 땅을 위한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 준 열쇠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수단이자 자원 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가거나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거나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우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삶에 적용하지 않고, 드러내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주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만 보면 식욕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 때 일주일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섭취하거나 (사실 건강한 신자가 되기 위해 결코 소화시키지도 않습니다) 혹은 말씀을 받아 먹기는 하나 그것을 묵상하여 충분한 영적 영양분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매일마다 성경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면 그리고 성령이 당신 마음에 감동 주시는 말씀을 암기하는 습관에 베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런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짧은 감상문을 만드시길 권합니다.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은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세요. 하나님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기록하세요. 성경은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에베소서 6:17), 영적전쟁에 임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신갑주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에베소서 6:12-18).

세번째 수단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다른 근본적인 자원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등이 있습니다만 초기 교회처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3:1; 4:31; 6:4; 13:1-3 등). 바울은 그가 사역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또 영적 전쟁을 준비하는 그의 구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에베소서 6:18)!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 우리삶 가운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냐구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깨우시고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41). 당신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어하나 몸이 따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훈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필요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7). 기도는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15).

네번째 수단은 교회, 즉 믿는자들과의 친교 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실 때 두 명씩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선교 여행을 보면 한 사람씩 가지 않고 둘 이상의 단체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의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데 함께 시간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24-25). 또 서로 죄를 고백하라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6). 지혜로운 말씀의 구약에서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를 빛나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27:17). 다수는 단수보다 힘이 있습니다 (전도서 4:11-12).

몇몇 크리스챤들은 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위해서는 책임있는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엄청난 이득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고,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흔한일 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책임있는 파트너 혹은 집단을 가지면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와 자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어떤 때는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자원들을 사용할 때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을 견딜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질문: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대답: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두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이 두 가지 사항에 거리낌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구하는 바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뜻과 어긋나거나 당신의 기다림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이 알려주기를 원합니다. 일할 곳은 어디이고, 어디서 살고,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주시는 일은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은 말합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단 하나 우리가 선택하지 않기를 원하는 결정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결정을 내리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고, 진심으로 그분의 뜻만을 소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망을 당신의 마음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핵심은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즉 성경은 당신의 소망이 성경말씀과 어긋나지 않고 또한 당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당신의 소망을 따라 결정을 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분명 그분의 뜻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약 성서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질문: 기독교는 구약 성서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대답: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본래 구약성서의 율법이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 어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법에 대해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어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형식 과 속죄 하는 법 (희생) 에 대해 말 합니다. 또 어떤 율법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들만의 규정 (음식과 의복에 대한 규정)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규정들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구약의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우리는 구약성서의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의 법 (갈라디아서 6:2)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꼐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이 두 가지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40). 하지만 구약 율법이 오늘날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율법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표본 입니다. 동시에 구약 율법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 된다고 말 하는 것은 잘 못 된 일입니다. 구약 율법은 단일체 이기 때문에 모두 적용되거나 아니면 모두 적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십계명은 구약 율법을 요약 해 놓은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신약에서 반복되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제외한 모든 것).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신들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들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소유를 탐내지 않아 할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목적은 율법을 지키지 못 하는 자신을 알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 입니다 (로마서 7:79; 갈라디아서 3:24). 하나님께서는 구약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적용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충실하게 행한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율법사항들을 만족시키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질문: 십일조 헌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대답:
십일조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게 되는 주제입니다.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헌금에 대한 성경의 권고를 따르기 꺼려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습니다. 십일조나 나눔은 원래 기쁨과 축복으로 우러나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십일조는 원래 구약의 개념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상의 요구였는데,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은 각자가 벌어들인 모든 소유 중에 10%를 성전에 바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레위기 27:30; 민수기 18:26; 신명기 14:24; 고린도후서 31:5). 구약에는 십일조의 배 즉 23.3%를 필수적으로 생각 했습니다. 당시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세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렇게 율법적인 십일조 제도를 명령하거나 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바울은 신자들이 자신 소득의 일부분을 구별해서 교회를 도우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2).

신약성경은 몇 퍼센트의 수입을 따로 떼어놓으라고 언급한 곳은 전혀 없고 “얻은 대로 저축하라” 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2). 현대의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구약에 있는 10% 수치를 적용해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어야 하는 최소한의 정도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묶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 중에 할 수 있는 만큼을 기여하면 됩니다. 때때로 이는 십일조를 넘는 금액일 수도 있고, 못 미치는 금액일 수도 있습니다. 각 신자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유동성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또 한다면 어느 정도를 나누어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모든 십일조와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태도로 드려져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전도하는 법은?



질문: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전도하는 법은?

대답: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 그리고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복음을 나누는 일은 항상 어렵습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더욱 더 어렵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복음을 듣기 꺼려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누가복음 12:51-53).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 받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적당한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는 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전도해야 합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한복음 3:16) 알도록 확신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세요. 그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지혜를 주시도록 구합시다 (야고보서 1:5). 기도하는 것 이외에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의 모습을 보여서 그들로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변화를 볼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2).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가 말했습니다. “복음을 항상 보여주고 필요할 때는 말로 전하라.”

이 모든 것을 행하고 나서는 담대히 복음을 실제로 전해야 합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세요 (로마서 10:9-10). 항상 당신의 믿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 그리고 이것이 온유함과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께 모두 맡겨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위한 기도이며 그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며 그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금식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질문: 그리스도인들의 금식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답: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해야 한다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동시에 성경은 금식을 좋은 것, 유익한 것 그리고 기대할만한 일로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은 금식을 신자들이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행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3:4; 14:23). 또 금식과 기도는 자주 연결되어서 언급됩니다 (누가복음 2:37; 5:33).너무나 자주 금식의 초점을 음식 삼가에 두고 있습니다만 금식의 목적은 사실 나의 눈을 세상의 것으로부터 떼고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두는 데 두어야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하나님과 나에게 나타내는 하나의 길입니다. 금식은 새로운 통찰력을 주고 다시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돕습니다.

성경에서의 금식은 항상 거의 음식을 삼가는 것을 말하지만, 다른 방법의 금식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어떤 특정한 음식을 삼가는 것도 금식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1-5). 금식은 일정 기간만 한정되야 합니다. 장기간 하는 것은 건강을 해칩니다. 금식은 당신의 육체를 벌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금식은 또한 체중조절로 간주되어서도 안됩니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 금식하지 마세요. 그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얻기 위해 하십시오. 누구든지 금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음식을 완전히 삼가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당뇨병). 그러나 누구든지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무엇인가 삼가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눈을 돌리지 않을 때 그리스도에게만 더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길이 아닙니다. 금식이 변화시키는 대상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금식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으로 되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금식은 겸손과 기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6-18은 말하길,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질문: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대답:
인생의 한 시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오해를 사거나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받은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우리는 크시스쳔으로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말하길,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 골로새서 3:13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요점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나도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용서해야 합니까? 다름아닌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쳔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적이 없기에 다른 이들을 용서 할 능력 혹은 갈망이 없습니다.

슬픔과 회개에 휩싸인 사람이 내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죄 지은 사람까지도 조건 없이 용서하라고 합니다. 진실된 용서가 우러나지 않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유감과 분노를 표시하는 데 이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합니다 (마태복음 6:12). 예수님은 마태복음 6:14-15에서 말하길,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는 다른 성경 말씀들을 보면, 마태복음 6:14-15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했음을 가장 잘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 중에 어떤 한 가지를 순종하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죄짓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잘못 행할 때 마다 우리는 그들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의 허물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광대한 긍휼을 잘 들여다 보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아낄 만한 권리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자도 자신에게 지을 수 있는 죄 보다 더 큰 죄를 하나님께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만한 큰 용서를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어찌 우리가 더 작은 용서도 서로에게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8:23-35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는 이 사실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할 때 거침없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일서 1:9). 우리가 베푸는 용서는 하나님이 하신 용서가 무한하신 것과 같이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3-4).

영적 성장은 무엇인가?



질문: 영적 성장은 무엇인가?

대답: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만드는 일을 시작하셔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 영적 성장은 아마 베드로후서 1:3-8에 제일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한 열쇠인,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지식은 말씀에서 나타나며, 우리의 성장과 계발을 위해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5:19-23에 두 가지 목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은 육체의 행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기 전의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육체의 행위는 우리가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영적 성장을 경험함에 따라 육체의 행위는 점점 더 감소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지금 우리의 상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모습을 열거합니다. 영적 성장은 한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증가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변화가 일어날 때 영적 성정은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요한복음 14:16-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낡은 것이 새 것으로 교체됩니다 (로마서 6장-7장). 영적 성장은 평생 걸리는 과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할 때 (디모데후서 3:16-17), 그리고 성령님을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갈라디아서 5:16-26) 일어납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장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도록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되기를 원하시고, 영적 성장을 위해 우리가 경험 해야 할 것들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죄를 극복하고, 더욱 더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꾸준히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영적 전쟁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영적 전쟁을 얘기할 때면 우리는 두 가지 주요한 실수를 하는데 하나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모든 죄, 모든 마찰, 그리고 모든 문제를 사탄의 탓으로 돌리고 그 사탄을 좇아내야 한다고 불평합니다.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의 싸움은 보이지 아니하는 악의 영들을 대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도 무시합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하려면 성경에 근거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때로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때로는 귀신을 언급하지 않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와 싸워야 하고 (로마서 6장) 또 악한 자를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6:10-18).

에베소서 6:10-12은 말하길,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1) 우리는 오직 주님의 능력 안에서만 강해질 수 있다. (2)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이다. (3) 우리의 전쟁은 이 세상에 있는 사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강력한 예는 유다서 9절에 있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면 됩니다. 미가엘은 가장 힘센

하나님의 천사인데도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사탄을 꾸짖지 아니하고 말하길, “주님이 너를 꾸짖으신다!”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7-8은 기록하길 마지막 날에 사탄은 미가엘에 의해 패배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미가엘은 사탄과의 전쟁에 있어서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로 사탄을 정죄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탄과 그가 부리는 영들보다 우월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탄을 꾸짖을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13-18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전신갑주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기도로 견고히 서야 한다고 합니다. 이 영적인 무기들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 무엇을 대표합니까? 첫째, 사탄의 거짓에 대해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내가 의로워졌다는 사실로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얼마나 많은 저항을 받든지 간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넷째, 얼마나 강한 공격을 받던지 간에 믿음 가운데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의 궁극적인 방어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 그리고 다른 영적인 힘이 이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우리의 방어 무기는 우리의 의견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영적 전쟁은 오직 기도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 우리의 궁극적인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공격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새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태복음 4:1-11). 각각의 유혹은 같은 방법으로 답해졌습니다 - "기록하였으되"라는 말들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악마의 유혹들을 상대로 한 가장 강력한 무리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악마를 대적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셨다면, 우리가 다른 방법을 사용 할 필요가 있을까요?

반면에 영적 전쟁에 있어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예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의 경우입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저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사도행전 19:13-16).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었지, 영적 전쟁에 임하는 데 있어 실제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영적 전쟁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데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요약하면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의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정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쟁에 대항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과 그가 부리는 귀신들을 대항해야 하는 반면에 모든 죄나 문제들이 사탄으로부터 와서 쫓아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염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문: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답:
이 질문은 오랜 세월 수 많은 사람들이 물어왔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엘리가 확인해 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3:1-10). 기드온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제적인 계시를 받았으나 그가 들은 것을 계속 의심하고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표적을 구했습니다!(사사기 6장 특히 17절-22절, 36절-40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지금 기드온과 사무엘이 당시 가지지 못했던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완성된 성경이 그것인데 우리는 이를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인생에 있어서 특정한 질문이나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약속하신 것과 모순되게 당신을 이끄시거나 지도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인지해야 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에 속하는 자들 즉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지하는 양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목자로써 인지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알아 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 하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기도, 성경 공부,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갖게되면 그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더 쉽게 인지 할 수 있습니다. 은행의 점원은 진짜 돈을 아주 세밀히 공부하면서 위조지폐를 분별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것이 가짜를 찾아내는 가장 쉬운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즉 그 분이 말씀하신 바에 친숙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거나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한나님은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말씀을 통해 이야기 하십니다. 때로는 성령님이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그리고 환경을 통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성경 말씀 진리에 적용시켜 봄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