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교리에 대한 질문들


만민 구원설/ 보편적 구원은 성경적인가?



질문: 만민 구원설/ 보편적 구원은 성경적인가?

대답:
만민 구원설은 모든 자가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보편적인 구원론 즉 모든 인류가 결국에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을 너무 강조한 결과-하나님의 의로움과 공의를 무시한채-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도 믿도록 도울 것이라는 바램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낼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럼 먼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봅시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길 천국에서 지속되는 시간 만큼 지옥도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6은 “저희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라 합니다만 주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그곳은 영원한 곳이라 하십니다. 이 영원한 불은 이미 마태복음 25:41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마가복음 9:44은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이라 합니다. 즉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불타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꺼지지 않는 불”을 모면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습니다. 어떤 길을 가도 천국에 다다르게 된다 혹은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가도록 하실 것이다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분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도록 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유일한 문이 되십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또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의 하들을 거부하기로 하는 것은 구원 받을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16, 36).

이런 구절들을 보게 되면, 만민 구원설, 보편적 구원론은 성경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하게 됩니다. 만민 구원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은 포용성이 없고 배타적이라 비난하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안해낸 진리가 아니라 단지 주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간단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대면하기 싫고 또 자신을 구원할 주님의 필요성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구원의 공급하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를 과소평가 즉 가치를 낮추는 것이며, 또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의 필요성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불가지론은 무엇인가?



질문: 불가지론은 무엇인가?

대답: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도 없고 증명해 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Agnostic의 본래 뜻은 “지식이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불가지론은 무신론의 지적인 차원에서의 인정이라 하겠습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을 할 수 있고 혹은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불가지론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합니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4:24). 그러므로 볼 수 없고. 또한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나타내지 않는 이상, 인간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0).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 가운데 아주 자명하며 (시편 19:1-4), 또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고 (로마서 1:18-22), 사람의 마음 가운데 확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도서 3:11).

불가지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 모두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회색주의적인 색깔을 주장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서도 안되고 불신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증명하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논쟁 자체를 위해서,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분명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을 생각하지 말고, 유신론과 무신론/ 불가지론 모두 동일하게 옳은 것으로 본다면, 죽음 후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어느 입장이 더 합리적인지 살펴 봅시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면, 두 가지 입장 모두 죽은 후에는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신론/불가지론자들도 인간의 죽음에 대해 말해줄 누군가는 최소한 있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입증할 수도 없고, 입증 못할 수도 없다는 입장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도 있는 이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니는 데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의심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의심하는데, 하나님을 믿도록 이미 주신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1:33-34을 선포하길,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의 방법/길들을 믿음을 가지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을 자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러길 원하십니다. 신명기 4:29은 주장하길,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무신론은 무엇인가?



질문: 무신론은 무엇인가?

대답: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는 관점인데, 최근에 새롭게 계발된 것은 아닙니다. 시편 14:1은 대략 기원전 1000년에 다윗에 의해 쓰여졌는데 무신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 최근 통계에 의하면 무신론자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약 10%의 사람들이 자신은 철저한 무신론자라 표명한답니다. 그럼, 왜 무신론자들이 증가하는가? 무신론은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논리적으로 과연 옳은 것인가?

가장 근본적으로 왜 무신론이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봅시다.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간단히 증명하지 않는가? 보이심으로 증명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간단히 믿을 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길 원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베드로후서 3:9) 구원을 선물로 받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3: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여러 차례 구약에서 자신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만 (창세기 6장-9장; 출애굽기 14:21-22; 열왕기상 18:19-31),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악한 길에서 떠나 모두 하나님을 순종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도 구세주로서 믿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 단순히 신을 논하는 신학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길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성경은 말하길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을 때 복 있다 합니다.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 비논리적인 믿음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많은 논쟁거리들이 있습니다. 본 사이트의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하길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에 (시편 19:1-4) 자연에 (로마서 1:18-22)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전도서 3:11) 분명히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무신론을 믿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모두 알아 보았고, 또 우주가운데 가볼 수 있는 모든 곳에 가보았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았다는 전제하에 나온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무신론자도 이런 가정 하에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가정을 사실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는 없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이 태양의 중심에는 분명히 살지 않고, 쥬피터의 구름 아래에도 아니고, 먼 행성에도 없다고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증명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가 되려면 유신론자가 될 때 요구되는 믿음이 동일하게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도 입증될 수 없는 관점이기에 하나님의 존재는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은 나의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나의 믿음이라고 비논리적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아주 분명히 알 수 있고, 예리하게 느껴질 수 있고,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도 입증될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편 19:1-4).

영혼 절멸설은 성경적인가?



질문: 영혼 절멸설은 성경적인가?

대답:
영혼 절멸설은 불신자들은 운명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소멸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 멸절설’ 은 사람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다는 끔찍한 생각 때문에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영혼 멸절설을 주장하는 몇 개의 문장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악한 자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영혼이 소멸할 것이라는 믿음은 몇 가지 교리 즉 (1) 죄의 값 (2) 하나님의 공의 (3) 지옥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말할 때영혼 절멸론자들은 불못에 대한 의미를 오역했는데, 사람이 죽어서 불못에 떨어지면 즉시 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못은 육적, 영적인 영역 모두를 말합니다. 단순히 육체만 불못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 영혼 모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은 육체를 태울 수 있는 불에도 타지 않습니다. 어떤 구절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도 구원 받은 자들과 동일하게 부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계시록 20:13; 사도행전 24:15)합니다만,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그들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또 영혼 절멸설은 영원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대개 영원으로 해석되어 왔던 그리스어 “aionion”이 영원으로 정의되지 않고, “나이” 혹은 “영겁”을 나타내는 한 구체적인 시대임을 밝혀 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쓰인 “aionion”은 영원한 분량의 시간을 분명히 뜻합니다. 계시록 20:10은 사탄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은 불못에 던지워져 낮과 밤으로 고문 받을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그 세 존재는 불에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지 않은 자들도 불못에서의 운명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계시록 20:14-15) 지옥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마태복음 25:46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이 구절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운명을 언급하는 데 동일한 그리스어가 쓰였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한 세대만을 고문 당한다 본다면, 의인도 한 세대 동안만 천국에 있게 되는 것이고, 믿는 자가 영원히 천국에 거하게 된다면 악인은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된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 절멸론자들이 지옥의 영벌을 반대할 때 자주 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유한한 양의 죄를 지은 인간을 무한하게 영원히 지옥에서 벌하는 하나님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70년 동안 죄를 짓고 산 사람을 어떻게 영원토록 벌하시는가 말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죄는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이유는 죄는 궁극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음란과 살인의 죄를 저질렀을 때 말하길,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4)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 장군에게 범죄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다윗은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존재이기에 모든 죄는 그만큼 영원한 처벌을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영혼 절멸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또 개인적인 측면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문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천국에서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불평이나 슬픔은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21:4를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다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있지 않음을 볼 때, 그들이 천국에 속하지 않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을 거부했기에 심판 받았음을 100%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14:6). 이를 받아 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부재로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자들을 빼놓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를 걱정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을 것인지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게 하신데 대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죽은 후에 소멸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은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죄 값을 갚은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에 떨어져서 그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께 두면 구원받고, 용서받고, 깨끗케 되고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처소를 약속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을 구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이런 영생의 선물을 거부한 결과는 영원히 대면해야 할 날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프레터리스트의 마지막 날에 대한 관점은?



질문: 프레터리스트의 마지막 날에 대한 관점은?

대답:
프레터리스트는 계시록은 말세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초기 교회들 사이에서 이미 벌어졌던 혼란을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정도는 각기 다르지만, 프레터리스트즘 은 계시록은 미래의 구체적인 사건은 다루지 않은다는 개념과 함께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을 결합시킵니다. 프레터리스트 운동은 근본적으로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종말론적 예언들은 서기 70년 그러니까 로마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멸망시켰을 때 이미 다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1세기에 존재했었던 교회에 보내진 것인데, 오늘날 교회에서도 적용할 점들이 있고, 6장에서 22장은 다른 성경의 예언서를 해석하는 것과 같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취되어지지 않은 예언들이라 해서 꼭 은유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취된 예언도 보면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첫 번 오심에 대한 구약의 모든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예언된 그대로 오셨습니다 (다니엘 9:25-26). 또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이사야 7:14). 우리의 죄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53:5-9). 이런 예들은 구약의 몇 백 가지 예언들 중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 예언들은 주님께서 예언자들에게 주셔서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거나,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벗어나 특별한 방법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프레터리즘은 전반적으로 계시록을 번역하는데 있어 모순됩니다. 그들의 종말에 대한 관점은 6장에서 18장은 상징적, 은유적이라 합니다. 즉 문자 그대로 일어날 사건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19장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자 그대로 실제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곧바로 20장은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21장과 22장은 최소한 반 정도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실제로 있을 것이라 합니다. 계시록이 놀랍고도 때로는 혼란스러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건들은 아주 구체적인 묘사로 되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한 부분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부정하는 것은 계시록의 어느 부분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인봉, 나팔, 은그릇, 증인들, 144,000, 짐승, 거짓 선지자, 천국 왕국 등이 은유적 상징적 용어라면, 무슨 근거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땅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프레터리즘의 오류입니다. 이것은 계시록을 해석하는 자들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읽고, 믿고, 순종하는 것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열린 신학은 무엇인가?



질문: 열린 신학은 무엇인가?

대답:
열린 신학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인데, 그 주요 논쟁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진실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미래를 다 알고 있다면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즉 열린 신학은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만을 아시지, 미래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린 신학은 하나님을 묘사한 일부 성경 구절들을 그 근거로 하는데, “뜻을 돌이키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고” 혹은 “이제야 아노라” (창세기 6:6; 22:12; 출애굽기 32:14; 요나 3:10)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미래를 다 알고 계시다는 다른 많은 성경 구절들을 감안한다면, 그 일부 구절들은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하나님 자신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무엇을 선택할지 다 알고 계시지만, “마음을 바꾼다는 것”의 뜻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께서 달리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악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놀라고 실망했다는 것은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열린 신학과 뚜렷이 대조되는 시편 139편 4절과 16절은 말하길,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약이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미래의 종국을 알지 못하시다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자 하시는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시겠습니까?

결국, 열린 신학은 설명하기에 난해한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 의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실패합니다. 칼뱅주의가 인간을 이미 프로그램된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듯이, 열린 신학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6a). 그러므로 열린 신학의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생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시도는 그 거대한 바다를 인간이 다 마셔 버릴 수 있다는 착각일 것입니다. 열린 신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거부해야 합니다. 열린 신학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 자유의지에 대한 한 설명이 되기는 하지만 성경적 설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