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아동교육에 대한 질문들


성경이 말하는 좋은 부모는 어떤 모습일까?



질문: 성경이 말하는 좋은 부모는 어떤 모습일까?

대답:
자녀교육은 어렵고 또한 마음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보람차고 뿌듯한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부모가 자녀들을 거룩한 자로 양육할 수 있는지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명령에 따라 사는 거룩한 자가 되도록 도우려면, 부모는 신명기 6:7-9에 있는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주신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따름으로서, 부모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예배하는 주일 아침이나 철야 기도 시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 많이 배우지만, 부모님의 행동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모든 자신의 행동에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들을 잘 인식하고,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순복하는데 성숙해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5:21). 동시에 하나님은 질서를 위해 권위를 세우셨는데, 고린도전서 11:3은 말하길,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열등하지 않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권위에 대한 순복 없이는 질서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한 가정의 머리로서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버리신 것과 같이 사랑하도록 책임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5:25-29).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남편이 리더쉽을 지닐 때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보다 쉽게 순종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5:24; 골로새서 3:18). 아내의 주요 책임은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고, 현숙하고, 정결하게 살고, 그리고 가정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디도서 2:4-5). 여자들은 본성적으로 남자보다 양육에 더 뛰어난데 하나님이 여자에게 먼저 후손을 보살피는 역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훈련과 훈계도 또한 자녀 양육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잠언 13:24를 보면, “징계를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렇게 훈육과 훈련 가운데서 자라나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그들은 방향감각이나 자기 절제가 떨어지고, 자라날수록 반항적이거나 하나님을 포함해서 모든 권위를 존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언 19:18을 보면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명을 망칠찌라” 합니다. 동시에 훈련은 사랑으로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원망을 품거나, 낙심하거나 반항적으로 자라납니다 (골로새서 3:21). 하나님은 훈련은 고통스러운 것임을 아셨습니다 (히브리서 12:11). 그러나 사랑의 지침을 따르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유익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그리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하거나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또 중요합니다. 정기적으로 성경 위주의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나(히브리서 10:25), 부모가 성경 공부하는 것을 보게 하거나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경 공부하는 것들 모두 좋습니다. 그들과 말씀을 두고 토론하고 일상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자로서 자식에게 본을 보여 주면서 아이를 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크리스챤 아버지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질문: 성경에서 크리스챤 아버지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대답:
성경에 있는 가장 큰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2절에 가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절-7절) 합니다.

히브리의 역사를 보면 아버지는 자녀가 영적으로 자라나고 복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길들을 열심히 가르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말씀대로 순종하는 아버지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점은 아이들은 주님의 양육과 훈계 가운데서 자라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잠언 22:6-11중의 특히 6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훈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가장 처음의 가르침인데, 예를 들면, 초기 교육을 말합니다. 이런 훈육은 부모가 소망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아버지의 자녀 양육을 위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4를 보면 부모님의 양육 태도에 대해 긍정적,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다룹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녀 양육에 대한 아버지의 책임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면은 아버지의 엄함, 부정당함, 차별, 혹은 불합리한 권위 사용을 할 경우 아이들이 나쁜 성향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은 포괄적인 방향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주의 교양과 권고로 일평생 동안 교육하고, 키우고, 행동을 양성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양육 혹은 자녀 교육 즉 교육과 훈련의 전 과정입니다. “권고”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실수 (건설적인 어투로)나 혹은 책임을 (아이들의 나이와 이해력에 맞추어서) 자꾸 일러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추려보면, “성나게 하다”는 자극하다, 격노하게 하다, 짜증나게 하다, 분노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이는 부모의 잘못된 정신과 방법으로 행해진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지나친 엄격, 비합리, 고집, 지독함, 잔인한 요구들, 불필요한 제한들 그리고 권위를 내세운 이기적인 주장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자극들은 적대감을 일으키고, 애정이 사라지게 하고, 책망 받을 일이 없는지 신경이 곤두서고, 결국에는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결론 내리게 만듭니다. 현명한 부모는 (우리 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아이들이 순종하고 싶게 만들고 사랑과 온유함 가운데서 순종할 수 있게 만듭니다.

에베소서 6:4절의 긍정적인 부분은 종합적인 지시- 그들은 교육하고, 양육하며, 주의 교훈과 훈계로 그들의 행위를 발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과 훈련의 전반적인 과정입니다. “훈계” 란 단어는 아이들의 잘못된 점(건설적으로) 지적하고, 의무(책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인격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유일하게 참된 신앙이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진실된 하나님이듯, 유익한 교육의 방법은 주의 교양과 훈계인 것입니다. 교훈과 규율에 의한 훈련의 전 과정은 하나님이 제시하고 집행하는 것이어야 됩니다. 그래야 주의 권위가 지속적이고 즉각적으로 아이의 생각과 마음과 양심에 연락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신을 진리와 책임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권위로 내세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 측면의 “자아”를 계발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즉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교사로 그리고 통치자로 만들 때 만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가운데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이 아버지에게 말하는 교훈은 항상 하나님께 이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그것들을 인간의 수준과 경험으로 끌어내리곤 합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로서 역할은 과연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여기까지 그 질문에 맞게 대답을 써 내려왔는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상적인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아들을 셋 키우는 자로서 얼마나 많이 실패를 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 말씀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말하길, “막대기 옆에 항상 사과 하나는 준비해 두라. 아이들이 잘할 때를 대비해서” 일반 교육과 문화에 있어서 단련은 조심스러운 배려와 몸에 벤 기도 생활을 통해 행해져야 합니다. 육체적 체벌, 단련,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의한 상담이 책망과 격려 모두를 주는 것이라면 이는 “권고”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얻는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며 또한 부모님(특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훈육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에 대한 앎 없이, 그리고 자기 절제의 덕목 없이 자라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가 되는 길입니다. 아버지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든지 삶을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적용 되어져야 합니다. 아버지로서 역할 본보기에 충실할 때, 아이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바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어디에서 살건, 평생 유익한 삶을 살아나가도록 굳건히 세워줄 것입니다. 아이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배울 것이고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머니가 되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는?



질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머니가 되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는?

대답:
어머니가 되는 것은 많은 여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한 아주 중요한 역할입니다. 디도서 2:4-5에 보면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침 받습니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아이들은 주께로 말미암는 선물입니다 (시편 127:3-5). 디도서 2:4에서는 그리스어로 “필레오테크노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는 특별히 “모성애”를 지칭합니다. 이 단어는 내 아이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라, 보살펴라, 훈육해라, 다정하게 안아줘라, 필요를 채워라,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라 라는 뜻을 가집니다.

말씀안에 그리스도인 어머니에게 주어진 몇가지 명령들입니다.

유용성-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신명기 6:6-7)

관계 맺음 (관여성)-토론, 같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에베소서 6:4)

교육- 성경, 성경적 세계관 (시편 78:5-6, 신명기 4:10; 에베소서 6:4)

양성- 재능 계발과 장점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

훈련/단련- 주님에 대한 경외 가르침, 사랑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강하게 계속적으로 규제함 (에베소서 6:4; 히브리서 12:5-11; 잠언 13:24, 19:18, 22:15, 23:13-14, 29:15-17).

양육- 계속적인 지지,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고, 수용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 받는 환경 조성(디도서 2:4, 디모데후서 1:7, 에베소서 4:29-32, 5:1-2, 갈라디아서 5:22, 베드로전서 3:8-9).

성실하게 모범되기- 언행일치,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거룩한 삶의 본질을 배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신명기 4:9, 15, 23; 잠언 10:9, 11:3; 시편 37:18, 37).

성경은 모든 여자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되도록 축복 받은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비중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삶에 있어서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많은 귀찮은 일들을 해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기간 동안에는 아이를 베고, 유아기 때는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것처럼, 아이가 어린이, 십대, 청년,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계속적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하는 일들은 변화되고 발전되겠지만 어머니의 사랑, 보살핌, 양육, 그리고 북돋아주는 어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질문: 그리스도인들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대답:
어떻게 아이들을 잘 훈련하는 문제는 배우기 어려운 과제이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년간 자녀 체벌은 (혹 다른 모양의 체벌) 시대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신체적 가해를 동반하지 않은 다른 체벌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국가들에서는 자녀 체벌이 불법으로 입법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체벌 후 정부에 보고될까봐 자녀 교육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아동학대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 훈련이 육체적으로 손상을 입히는 정도까지 되어서는 물론 절대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적당한 절제된 자녀 체벌은 유익한 것이고, 자녀를 옳은 길로 이끈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적절한 육체적 체벌을 권장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 가느리라” (잠언 23:13-14)-잠언13:24, 22:15, 20:30). 이렇게 성경은 강도 높은 훈육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유익한 존재로 자라나야 하며, 또 어릴 때 보다 쉽게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련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반항적으로 자라며, 권위에 대해 존경하지 못하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쉽게 따르거나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옳은 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단련하시며, 우리가 범한 행동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시편 94:12; 잠언 1:7; 6:23, 12:1, 13:1, 15:5; 이사야 38:16; 히브리서 12:9). 이들은 단련이 유익한 면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울 때 너무 수동적이거나 혹은 너무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맞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버릇없이 자라게 되거나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체벌 없음이 아이들을 망치게 됩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어 29:15). 또 어떤 부모들은 성경이 말하는 체벌을 잘못 이해하여 아동 학대를 정당화합니다.

체벌은 아이들이 옳은 길로 가도록 단련시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브리서 12:11). 하나님의 단련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체벌은 육체적인 손상을 남기게 되는 정도는 안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손상을 입히지 않을 부분을 때리는 것은 아이들이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배우도록 할 수 있다면 받아들여집니다. 체벌은 결코 아이들을 분노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하거나 혹은 그들의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서 남용되면 안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주께서 인정하신 단련과 훈계에 의한 자녀 양육은 절제되어지고, 그름을 지적하고, 사랑 가운데 행해지는 것이어야 되겠습니다.

산아제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도 산아 제한을 사용해야 하는가?



질문: 산아제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도 산아 제한을 사용해야 하는가?

대답: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창세기 1:28)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안정된 환경을 조직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은 종종 귀찮은 존재나 짐으로 취급합니다. 부모의 진로, 경제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들 때문에 피임약을 사용하게 됩니다.

산아제한 뒤에 숨겨진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다르게 성경에 보면 아이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의 관점이 나옵니다.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창세기 4:1; 33:5). 아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유산입니다 (시편 127:3-5). 아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누가복음 1:42). 아이는 노인의 면류관입니다 (잠언 17:6). 하나님은 임신하지 못하는 부인을 아이로 축복하십니다 (시편 113:9; 창세기 21:1-3; 25:21-22; 30:1-2; 사무엘상 1:6-8; 누가복음 1:7; 24-25). 하나님은 아이를 은밀한 데서 지으십니다 (시편 139:13-16). 하나님은 그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아십니다 (예레미야 1:5; 갈라디아서 1:15).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의 얘기가 나옵니다. 엘은 다말이라 불리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엘은 아주 악한 사람이라 하나님은 부인인 다말이 남편과 자녀가 없게 될 것을 아시고도 엘을 죽게 하십니다. 그 후 다말은 엘의 동생 오난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데, 이는 신명기 25:5-6에 나와있는 레비레이트라 불리는 당시 혼인법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난은 다말과 사이에서 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나누어주기 싫어서 최초의 산아제한을 시행하는 자가 됩니다. 창세기 38:10절에 보면,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매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합니다. 오난은 단지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만 다말과 결혼한 것이었지, 죽은 형을 위해서 족보를 이끌어갈 후손을 낳아야 한다는 책임을 거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신 것은 그 산아 제한 뒤에 있는 그의 부정한 동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세상이 말하는 데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피임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피임을 정의하면 단지 임신을 방지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임 자체가 옳은지 그름을 결정짓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난의 경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피임을 하게 되는 그 동기가 옳고 그름을 결정짓습니다. 만일 부모가 아이를 키울만큼 성숙하지 않거나 경제적이나 영적으로 모두 준비되지 않았다고 여겨서 한 기간 동안 피임을 하게 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즉 동기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아이를 갖는 것을 항상 좋은 일로 봅니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아이를 당연히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항상 불행한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무도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이를 갖으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정 기간 동안 피임을 하게 되는 경우를 반박할 수 없습니다. 부부는 언제 아이를 가져야 할지 그리고 몇 명의 아이를 낳아야 할지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질문: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대답:
이는 결혼과 매일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이미 ‘순종’을 설계하셨습니다. 태초에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사람이 순종해야 할 다른 권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죄가 세상에 들어와 그 죄로 인하여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들어온 땅에서 율법을 진행시킬 수 있는 권위를 세우시고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보호제도도 공급하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순복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야고보서 1:21; 4:7). 고린도전서 11:2-3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복하신 것과 같이 남편들이 그리스도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하길 아내들도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순복은 사랑이 바탕이 된 리더쉽이 있을 때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할 때 (에베소서 5:25-33),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은 저절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그리스도어로 순종(Hupotasso)는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즉 하나님, 리더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순종은 단 한 번만 내리는 결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유형의 행동으로 굳어질 수 있는 지속적인 마음의 태도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순종은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에게 하는 일방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순복은 성령 충만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그리고 하나님께 성숙하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순종은 쌍방적인 것입니다. 순종은 영광과 온전함을 나타냅니다. 아내가 그리스도가 교회에 베푸셨던 그런 사랑을 받으면 아내의 순종은 어렵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24은 말하길,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여기서 아내는 모든 옳음과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율법을 어기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하면서 남편을 순종하면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튜 헨리는: 아내는 남편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즉 남편의 두뇌로 만들어져서 남편을 다스리거나 발로 만들어 져서 남편에 의해 지배받게 하지도 않았다. 남편 옆에 있도록 만들어졌기에 남편과 동등한 위치를 지니면서 그의 팔 아래서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고 또 그의 심장에 가까워서 사랑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5:21의 순복은 5:22에 있는 순복과 동일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서로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19-21절은 모두 성령충만한 결과들입니다 (5:18). 성령 충만한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5:19), 감사가 넘치며 (5:20), 서로에게 순종합니다 (5:21). 그래서 22-23절에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종이란 아내가 전적으로 짓밟혀도 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도움아래,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방탕한 자녀가 있는 기독교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질문: 방탕한 자녀가 있는 기독교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대답:
돌아온 탕자 (누가복음 15:11-32) 이야기를 보면 부모가 교육한 것과 어긋나게 걷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고 대응해야 할지 몇 가지 원칙을 보여줍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녀가 성인이 되면 그들은 더 이상 부모의 권위 아래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보면 그 아들은 자신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만약 그 아들이 전혀 거듭난 적이 없는 아들이라면 이런 육체를 따르는 삶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 영접한 적이 있는 자가 이렇게 행동했을 경우 우리는 그를 방탕자라고 합니다. 방탕이라는 글자는 이 이야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글자의 뜻은 낭비적으로 혹은 무모하게 사치하다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무분별하게 쓴다 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자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와 있는 아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께 반항하여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자랄 때 받은 모든 양육, 교육, 사랑과 보살핌을 뒤로 저버렸습니다. 즉 모든 반항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고, 결국 그것이 부모님과 부모님의 권위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그 때 세상에 자신이 가진 모든 유산을 탕진했고, 또한 부모님이 주신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돌아온 방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은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따라가서 간섭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내린 선택이나 결정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버지는 변함없이 집에서 머물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와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다시 돌아가려 할 때, 부모는 오히려 기다리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아들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원리는 우리의 아들 딸들이 자신의 길을 주장하며, 힘든 결과를 가져올 방향을 선택할 때, 부모님은 그렇게 하도록 떠나 보내야 합니다. 부모는 떠나는 자녀를 붙들지 말고 또 다가올 결과를 가지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자녀들이 회개하여 방향을 돌이킬 기회를 소망하며 가정을 지키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만 부모는 그런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또한 자녀의 반항을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괜히 마음만 분주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5).

한 때 아이들은 합법적으로 성인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와 정부가 부여한 권위에만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로마서 13:1-7).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 그들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을 사용하셔서 모든 자들에게 지혜를 주시지만 이는 또한 각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 (에베소서 6:4) 순종가운데 아이들을 주님 안에서 교육한 후,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보살피고 기도하고 문제는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는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행한다면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큰 위안을 찾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세기 18:25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