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결정에 대한 질문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질문: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대답: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삶의 목적, 성취, 만족을 찾아 낼 수 있을까? 과연 영원히 중요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성취하려고 한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왜 인간관계에는 금이 가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지 의아해 합니다. 한 운동선수가 최고 정점에 오르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처음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해주었으면 좋았을 말은 무엇이었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줬다면 좋았을거에요.” 목표들은 이루고 나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공허한 결과를 가져오곤 합니다. x

인본주의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업의 성공, 부, 인간관계, 좋은 인간 관계, 성관계, 오락, 그리고 선행 등등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 부, 인간관계, 그리고 쾌락을 얻고 나서도 그들 깊은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증언합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 느낌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라고 말 했습니다. 저자인 소로몬 왕은 측량할 수 없는 부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녔으며,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다른 왕국들이 부러워할 만한 궁전과 정원, 가장 좋은 음식과 술, 모든 종류의 오락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때 원하고 추구했던 것들을 언급하고 나서 “해 아래 있는 삶” 즉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삶은 헛되다고 말 했습니다. 왜 그런 허전함이 생길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위를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 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다…” (전도서 3:11). 우리의 마음은 “지금 여기 (here-and-now)”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성경 첫 부분인 창세기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 여기서 우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죄로인해 타락하기 전 그리고 땅이 저주받기 전에는 다음 구절들이 말 하는대로였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창세기 2:18-25); (2)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셨다 (창세기 2:15); (3)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하셨다 (창세기 3:8); 그리고 (4)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창세기 1:26). 이 사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인간들이 삶을 성취하는 데 있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특히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인간의 죄와 저주받은 땅으로 인해 변해 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x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의 천국과 땅을 멸하시고 새 천국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때에는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불의하다 심판 받고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죄로 인한 저주, 슬픔, 병, 죽음, 고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7).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제 하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 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그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삶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삶에 지나지 않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기쁨을 가능하게 하셨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3:43), 이 땅에서의 만족되고 충만한 삶을 가능하게 까지 하셨습니다. 그럼 천국에서의 그 영원한 기쁨을 이 땅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삶의 의미

현재와 영원한 삶의 의미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면서 잃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발견됩니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도행전 4:12; 요한복음 14:6; 1:12). 영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더 이상 죄 가운데 있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때,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기 시작할 때 얻게 됩니다.

이제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예수를 구세주로 찾는 데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고, 배우고, 그의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고, 기도로 대화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과 동행하는데서 발견됩니다. 당신이 크리스챤이 아니라면 (혹은 초신자 라면) “별로 그렇게 기쁠 것 같지 않은데!” 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라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8-3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하반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4-25).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이 말씀들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내 삶을 계속해서 스스로 인도해 결국 허무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만하고 소망이 가득차며 자족하는 삶의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삶은 아닌 가장 충만한 삶).

크리스챤의 삶은 이렇게 비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열렬한 스포츠 팬으로서 게임을 보러갈 때 몇 푼 안들여서 먼 좌석을 살 수도 있고 몇 만원을 들여서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좌석을 살 수 도 있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일을 아주 가까이서 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선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으려면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의 제자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지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쫓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값을 지불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한 자들). 그들은 가장 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이며 나중에 자신과 동역자들과 창조주를 후회없이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값을 지불하셨습니까? 아니면 기꺼이 지불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다시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헤메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



질문: 나는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

대답:
자살을 통하여 삶을 끝내려는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당신이 지금 그러시다면 체념이나 절망 등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같거나 더 이상 나아질만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인생은 정말이지 살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여기서 잠깐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의 역할을 담당 하시도록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럼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7). 아마 당신이 과거에 가졌던 거절감이나 자포자기에서 온 상처들이 이 말씀을 가로막고 있었을 겁니다. 그것들은 자기연민, 분노, 쓰라림, 복수심, 지나친 두려움을 가져왔고, 또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들을 일으켜 왔습니다.

왜 자살하면 안되는 걸까요? 친구여, 얼마나 나쁜 일들이 당신의 삶 가운데 일어나든지 간에 당신이 그 절망의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기다리시는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엄청난 빛 가운데 나오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희망입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받았던 거절감과 모욕감을 누구보다도 겪으신 분입니다. 이사야 53:2-6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에 대해 말하기를 모두에게 “경멸당하고 거절받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의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로인해 찔리고 상처받고 뭉개졌습니다. 그가 받은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구여,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인내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무거운 죄책감에 묶여 있든지 간에 당신이 겸손히 예수를 구세주로서 받아들인다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시편 50:15). 예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선택된 하나님의 일꾼들 중에도 끔찍한 죄를 지은 자들이 있습니다. 살인을 했다거나 (모세), 간음을 했다거나 (다윗 왕),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했던 자도 (사도 바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 받았고 주 안에서 풍성한 새 삶을 누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왜 자살하면 안되냐구요? 친구여, 하나님은 부서지고 망가진 것들 즉 지금 당신의 삶, 당신이 자살로 끝내려는 삶을 고치시려고 바로 당신 옆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1:1-3 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리고 그가 당신의 기쁨과 가치를 회복시키시도록 당신의 삶 가운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는 당신이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을 지탱하기 위한 새 영혼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다친 마음은 그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2, 15-17).

주를 당신의 구원자와 안내자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가 당신의 생각과 걸음을, 하루에 하나씩,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이사야 33:6). 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고민할 수 있으나 이제 당신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 (잠언 18:24)입니다. 당신의 결단의 시간에 주 예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길 원하신다면 당신 마음에 이렇게 말하세요. “하나님, 제 삶에 당신이 있으셔야 합니다. 저의 모든 과거를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저를 정결케 하시고, 치유하시고, 제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세요.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저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는데 이 곳에서 읽으신 내용이 도움이 되셨습니까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를 클릭하여 주십시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질문: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대답: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두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구하는 것이나 하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이 두 가지 사항에 거리낌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구하는 바가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뜻과 어긋나거나 당신의 기다림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때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이 알려주기를 원합니다. 일할 곳은 어디이고, 어디서 살고,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주시는 일은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은 말합니다.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단 하나 우리가 선택하지 않기를 원하는 결정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결정을 내리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고, 진심으로 그분의 뜻만을 소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망을 당신의 마음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핵심은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4). 즉 성경은 당신의 소망이 성경말씀과 어긋나지 않고 또한 당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당신의 소망을 따라 결정을 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하나님은 분명 그분의 뜻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크리스찬의 빚,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가? 금전적인 빚은 항상 옳지 않은가? 크리스찬이 돈을 빌리고 꾸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질문: 크리스찬의 빚,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가? 금전적인 빚은 항상 옳지 않은가? 크리스찬이 돈을 빌리고 꾸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대답:
로마서 13:8절의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것도 빚지지 말라는 바울의 구절은 제 때에 갚지 않은 모든 형식의 빚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심을 나타냅니다 (시편 37:21도 참조하세요). 대개 우리는 빚이라고 하면 금전적인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로마서 13:1-10절을 전체적으로 보면 더욱 넓은 차원에서 빚을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3:7). 정부가 국민에게 부과한 세금, 공공 사용료, 관세뿐 아니라, 권위에 대한 존중, 영예, 찬미 등도 또한 포함합니다. 모든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인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와 함께 살고 일하는 사람들 즉 세금을 거두고 징수하는 정부에게까지 확장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빌린 돈에 대한 이자를 거부하는데, 성경은 빌린 돈에 대해 정당한 이자가 주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잠언 28:8, 마태복음 25:27).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법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자를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5:35-38). 이 법은 사회적, 재정적, 영적인 의미를 모두 두루 담고 있는데, 그 중 중요한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지 않도록 법이 이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 만으로도 이미 어려운데, 도움을 구하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는데 있어 이자를 내야 하는 것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지어야 할 짐이 더욱 많아지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가난한 자에게 꾸어준 돈에 대한 이자에 대해 자비를 베풀라는 말입니다. 돈을 빌려준 자는 빌려준 그 돈은 한 동안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동전 한 닢도 없을 때, 그의 자비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땅을 주셨듯이 (레위기 25: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난한 시민에게 그렇게 친절을 베풀기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의 죄에 대한 빚을 갚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특히 같이 믿는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관련하여 두 명의 빚진 자와 그들의 용서에 대한 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3-35).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8).

성경은 돈을 꾸어주는 것에 대해 금지도 허락도 특별한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빚을 지지 않는 것이 지혜라 합니다. 왜냐하면 빚은 우리가 빚을 준 자에게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빚을 지는 것이 악행이 될 때가 있습니다. 돈이 현명하게 다루어지고, 빚 상환을 잘 계획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금전적인 빚을 만들 수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병원에 가도 되는가?



질문: 그리스도인들도 병원에 가도 되는가?

대답: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말씀 신앙 운동(Word-Faith movement)에서는 의사를 찾는 것은 밈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간주되고,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를 방해한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크리스챤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같은 단체들은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막는 장애물로 여깁니다. 이러한 관점의 논리는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만약 당신의 차가 고장 났다면, 정비소에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고치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집안의 수도가 터졌다면, 하나님이 새는 곳을 막아주시길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배관공을 부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차를 수리하거나 수도를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치료를 행하는 기적을 행하신 다는 사실이 우리가 항상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보다 기적을 기대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의사는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단지 한 구절 즉 역대하 16:12절에,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삶 전체를 두고 보아야 하는 구절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그의 인생의 후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의약 처방”을 말하는데, 상처를 싸매다 (이사야 1:6), 기름을 바르다 (야고보서 5:14), 기름과 포도주 (눅 10:34),잎 (에스겔 47:12), 와인을 마시다 (디모데전서 5:23) 그리고 향유 특히 “길르앗의 유향” (예레미야 8:22)이 그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사랑을 받는 의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25-30을 보면 계속 피를 흘리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인은 많은 의원을 찾아 갔고, 가진 돈 모두를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께로 나아가, 예수의 옷 자락만을 스쳐도 자신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치유되었습니다.

왜 죄인과 함께 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2). 이상의 구절들을 통하여 아래의 원리들을 추려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의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렇게 보여져서도 안 된다. 의사는 때로 병을 치유하기도 하지만, 환자의 돈을 모두 소비하는 경우도 있다.
2. 의사와 이 땅에 있는 약품을 찾는 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고,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사용되어왔던 것으로 알 수 있다.
3. 어떤 육체적 질병이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야고보서 4:2; 5:13).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항상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지만 (이사야 55:8-9),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행사는 그의 사랑가운데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도록 역사하신다 (시편 145: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의사를 찾아가야 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지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약품을 계발하고 우리의 몸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 지능과 능력을 육체를 치료하는데 활용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의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치유와 약물을 쓰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 가운데 대면할 모든 어려움 가운데, 우리가 구할 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5).

운동을 해야 하는가? 건강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은?



질문: 운동을 해야 하는가? 건강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은?

대답:
삶의 다른 많은 영역들처럼, 운동에 관하여서도 극단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것에만 초점을 두고, 육체에 관하여서는 무관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에 관하여만 신경을 쓰고, 영적인 성장과 성숙에 대하여서 무관심합니다. 디모데전서 4:8을 말하길,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운동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나, 더 큰 가치를 지닌 경건을 얘기 함으로서 우선순위를 바로 잡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진리를 육체적 훈련으로 묘사하는데, 고린도전서 9:24-27을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행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디모데후서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디모데후서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리스도인이 운동하는 것, 잘못된 것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에베소서 5:29은 말하길,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성경은 또한 탐식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명기 21:20, 잠언 23:2, 베드로후서 1:5-7, 디모데후서 3:1-9, 고린도후서 10:5). 동시에 성경은 허영에 대해서도 경고합니다 (사무엘상 16:7, 잠언 31:30, 베드로전서 3:3-4). 운동에 대한 목적이 우리의 몸을 좋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부러움을 받기 위함이 되서는 안됩니다. 운동의 목적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서, 육적인 에너지를 통해서 영적인 목표에 초점을 둘 수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법정 소송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질문: 성경은 법정 소송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대답: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1-8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서로를 고소하기 위해 법정에 가지 말라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용서할 수 없고, 다른 입장만을 서로 내세우려 한다는 것은 결국 영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똑같은 문제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비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이유가 무엇이냐 이 뜻입니다. 하지만, 법정 소송만이 해결책이 될 경우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한 대로 중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따랐으나 (마태복음 18:15-17), 상대방이 여전히 옳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면 법정으로 가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같은 경우는 충분히 많은 기도로 지혜를 얻고, 영적인 리더들과 상의한 후에 진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고린도전서 6:1-6 는 교회 안에서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바울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법정 체계와 연관시킵니다. 즉 교회 밖에서 벌어지는 삶의 문제들 때문에 법적인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되야 하지, 법정으로 끌고 가서 해결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22장 이하에는 바울이 체포되어 자신이 한 적이 없는 일에 대해 억울하게 거짓 고소당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바울을 끌고 갔을 때 22장 24절로부터 말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 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 하며 신문하라 한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바울은 로마법과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을 그 보호책으로 내세웁니다. 즉 옳바를 동기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법적인 장치를 이용하는 것은 아무것도 잘못 된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6:7에서 바울은 선포하길, “여러분이 서로 법정에 고소한다는 것은 벌써 여러분이 완전히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라리 억울한 일을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사기를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 (공동번역) 바울이 여기서 염려했던 것은 믿는 자들이 나중에 할 간증거리입니다. 즉 결국 한 사람을 법정에 데려가서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한다면 차라리 믿는 자가 손해 좀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법적 권리입니까? 아니면 한 사람의 영원한 생명입니까?

요약을 하면, 그리스도인들끼리 교회 문제를 두고 서로 법정으로 가도 되는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시민 문제를 두고는 법정으로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할 수만 있다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비신자와 생긴 문제는 법정에 가도 됩니까? 다시 말하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경우에는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법적인 방어를 하는 것이 적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군복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질문: 그리스도인의 군복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대답:
성경은 군대에 대해 많은 부분 얘기합니다. 성경에 담겨진 군대와 관련된 사항 중 많은 부분이 상징적인 묘사이지만, 몇 구절은 본문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군복무에 대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군인이 되는 것은 존경 받고, 성경적인 세계관과도 일치됨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 보이는 첫 군대는 (창세기 14장),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과 그의 일당들에게 납치되었을 때 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훈련된 318명의 군사를 모아서 엘람의 왕을 공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군대가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고, 구하는 귀한 일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군대의 역사 후반부에 가면, 이스라엘 국가는 상비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신성한 군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그들의 군력을 강화하는 군대 계발이 늦은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정규 상비군은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 왕이 아주 강력한 중앙 정권 체계를 갖춘 후에야 계발되었습니다. 사울은 군대를 조직한 첫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3:2, 24:2, 26:2).

이렇게 사울이 착수한 군대를 다윗이 계속 진행하였습니다. 다윗은 군대를 증가시키고, 다른 지역에서도 자신에게 충성된 자를 모아 고용했습니다 (사무엘하 15:19-22), 그리고 군대에서 리더를 일으켜 그에게 리더쉽을 주었습니다 (요압). 다윗 아래서 이스라엘의 군대는 더욱 공격적인 입장을 취해서 암몬과 같은 이웃 지방을 흡수했습니다 (사무엘하 11:1, 역대상 20:1-3). 다윗은 24,000명의 12개의 군단이 돌아가면서 일년에 한 달씩 복무하는 시스템을 수립했습니다 (역대상 27). 솔로몬 때에 나라는 평화로웠으나, 그는 군대를 더 확장하고 전차와 말을 이끄는 군사들을 증가했습니다 (열왕기상 10:26). 상비군은 586 B.C.까지 즉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국가로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을 때까지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죽음 이후 왕국이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백부장 (백 명의 군사를 이끄는 높은 군사)이 다가왔을 때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권위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아주 분명히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믿었습니다 (마 8:5-13). 그래서 예수께서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직업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 언급된 많은 백부장들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그리고 좋은 성품의 소유자로 언급됩니다 (마태복음8:5,8,13; 27:54; 마가복음15:39,44-45; 누가복음 7:2,6; 23:47; 사도행전 10:1,22; 21:32; 22:25-26; 23:17,23; 24:23; 27:1,6,11,31,43; 28:16).

역사적으로 장소와 명칭은 변하지만, 군대는 성경의 백부장과 같이 존중 받아야 합니다. 군인이 되는 것은 존경받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동료를 “동료 군사”로 묘사합니다 (빌립보서 2:25).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주 안에서 강해지라고 하면서 군사적 용어를 사용합니다 (에베소서 6:10-20).

그렇습니다. 성경은 군복무를 직접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남성과 여성들로서 자신의 인격, 존엄 그리고 명예심을 가지고 국가를 섬기는 일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존중을 받는 자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군에서 복무하는 자들은 마땅히 사람들의 존중과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삶의 목적을 찾는 길,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 삶의 목적을 찾는 길,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답: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의 목적:
성경은 우리 삶에 목적이 무엇이여 할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삶의 목적을 찾고 또 발견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신이 살아 왔던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주는 허망함을 얘기한 후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솔로몬은 말하길, 인생이란 나의 생각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 합니다. 그는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른 삶의 목적은 이 땅에서의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다윗은 앞으로 올 시간 가운데 진정한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말하길,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에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5). 다윗의 온전한 만족은 내세에서 다시 깨어날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과의 교제), 그의 형상으로 (요한일서 3:2) 온전히 태어날 때입니다.

시편 73에 보면 아삽은 자신이 악인의 길로 유혹 받는 과정을 그리는데, 즉 악한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이득을 챙기고,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보면서 고민합니다. 그러나 아삽은 그 악인들의 종말을 예견하며, 악인이 이 땅에서 쫓는 것들과 대조되게, 25절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느니라.” 아삽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땅의 삶 가운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나열하면서, 한 때 그가 소유했고 성취했던 것들이 (특히 종교적으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쓰레기와 같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3:9-10에서 말하길, 그가 진정 원한 것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의를 소유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의 교제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난을 가져다 줄 때가 있더라도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결국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때를 소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삶의 목적: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나타날 일들을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 그의 지상에서의 천년 통치가 끝난 후에 구원 받지 못한 자들도 부활해서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 받은 후 불못에 영원히 던져질 것이라 합니다 (요한계시록 20).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서 영원한 상태로 진입하게 됩니다. 즉 창세기의 에덴 동산처럼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하나님은 인간과 살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2); 모든 저주 받은 대상들은 (인간의 죄로 인한 모든 지구상의 것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슬픔, 질병, 죽음, 고통) (계시록 21:4).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긴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고, 하나님은 그들의 신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도 이미 보았지만 구원 받은 자들은 모든 죄와 세상의 저주에서 벗어나서(내부적 외부적 모두) 그리스도와 같은 온전한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3:2-3).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삶의 목적: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1) 하나님과의 교제하고 (2)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3) 일하며 (4)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도 괴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일은 종종 순조롭지 않고, 자연을 다스리는 그 어떤 일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삶의 목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광 돌리며 천국에서의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누리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풍성한 삶-진리와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