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관련된 질문들


칼빈주의/ 알미니안- 어느 신학적 입장이 맞을까?



질문: 칼뱅주의 대 알미니안 주의- 어느 신학적 입장이 맞을까?

대답: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는 구원론을 두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논해보려는 신학의 두 입장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라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고보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두 가지 입장은 각각 5가지 견해로 특징을 보입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을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보고, 아르미니안은 일부만 타락했다고 봅니다. 완전한 타락은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물들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고, 부분적 타락은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물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아르미니안은 조건부의 선택론을 얘기합니다. 무조건적인 선택론은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결정에 근거한다는 즉 인간 개인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론은 하나님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고 선택할 것인지 미리 아시고(예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제한된 구속을, 아르미니안은 무제한의 구속을 말합니다. 이 점이 가장 난해한 견해입니다. 제한된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는 것이고, 무제한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를 위해 죽으셨으나 그의 죽음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를, 아르미니안은 거부할 수 있는 은혜를 논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이 한 사람을 구원에 초청하시면 그 사람은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고, 거부할 수 있는 은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에 초청하셨으나 많은 사람들이 거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인내를, 아르미니안은 조건부적 구원을 말합니다. 성도의 인내는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은 믿음으로 굳건해지게 되어 있고 결코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아르미니안의 조건부적 구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은 자유의지로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고 그러므로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지체)가 다양한 만큼 칼뱅과 아르미니안을 섞어 온갖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칼뱅과 아르미니안을 동일한 비중으로 혼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칼뱅의 입장 3개, 아르미니안 입장 2개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어느 정도씩은 이 두 입장을 혼합하고 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두 견해 모두 온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도 사실입니다. 또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 안의 믿음을 진실하게 결심하도록 부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그 둘은 모두 온전한 것입니다.

조직 신학은 무엇인가?



질문: 조직 신학은 무엇인가?

대답:
조직적이다는 말은 어떤 한 체계로 집어넣을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체계적 신학은 신학을 어떤 한 체계들로 분류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곳곳에서 천사들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성경의 한 부분만이 천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체계 신학은 천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성경 모든 부분에서 모아서 그것을 한 체계로 정리합니다. 이렇게 하여 천사학을 만듭니다. 이렇게 성경의 가르침을 분류해서 조직화하는 것이 조직신학의 전부입니다.

Paterology 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연구, 기독론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 성령론는 성령에 대한 연구, 성서학은 성경에 대한 연구, 구원론 구원에 관한 연구, 교회학운 교회에 대한 연구, 종말론 종말에 관한 연구, 천사론은 천사에 관한 연구, 기독교 악마연구는 크리스찬 관점으로 본 마귀에 대한 연구, 기독 인류학 인간에 관한 연구, 죄론 죄에 관한 연구를 말합니다.

성경적 신학은 성경의 한 부분을 연구하고 그 부분이 중점을 둔 다른 신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둡니다 (요한복음 1:1, 14; 8:58; 10:30; 20:28). 역사적 신학은 한 교리가 역사적으로 몇 세기 동안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에 대한 연구입니다. 교리신학은 교리를 체계화시킨 어떤 특정한 크리스챤 그룹들의 교리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칼뱅주의 신학을 들 수 있습니다. 현대 신학은 최근에 계발되었거나 최근에 부각된 교리 연구들을 가르킵니다. 조직 신학은 우리가 성경을 조직화된 방법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질문: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대답:
세계관이라 하면 어떤 한 특별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다양한 개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라 하면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말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세계관은 세계에 관한 그의 믿음의 총 집합체로서 큰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현실을 이해하는 그 사람만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세계관은 매일 의사 결정의 기초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식탁 위에 놓여져 있는 사과를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식물학자는 사과의 종류를 분류할 것이고, 예술가는 초점을 잡아 사과를 그릴 것이고, 장사꾼은 값을 매기고 사려고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점심으로 생각하고 먹겠죠. 어떤 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크게 보고 살고 있느냐에 의해 영향 받습니다. 모든 세계관은 즉 크리스찬이든 크리스찬이 아니든 동일하게 세 가지 질문을 다룹니다.

1)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 왜 있는가?)
2) 세상의 문제는 무엇인가?
3) 어떻게 그것을 해결할 것인가?

오늘날 만연한 세계관은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주의는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1) 우리는 어떤 목적이 없는 자연적 움직임의 우연한 산물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만큼 자연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3) 우리는 환경생태학과 보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다른 많은 관련 철학주의들을 일으켰습니다. 도덕적 상대주의, 현존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유토피아니즘이 그것 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이 세가지 질문을 성경적으로 답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창세기 1:27-28; 2:15). 2)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 모든 세상이 저주 받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3). 3) 하나님 자신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고 (창세기 3:15; 누가복음 19:10), 그리고 최초의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사야 65:17-25). 크리스챤 세계관은 우리가 도적적 절대성, 기적, 인간 존엄성,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을 믿게 합니다.

세계관은 복잡 다양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관은 돈부터 도덕성까지, 정치에서 예술까지 우리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단지 교회에서 사용하는 일련의 생각들 그 이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세계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이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전천년설은 무엇인가?



질문: 전천년설은 무엇인가?

대답: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수님의 천년 왕국 이전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 통치의 천 년은 숫자 그대로 일 천년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종말을 다루는 사건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꼭 알아 두어야 할 사항 2가지는 (1) 적합한 성경 해석 방법 (2) 이스라엘 (유대인)과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 사이의 구분입니다.

첫째, 적합한 성경 해석 방법론은 성경이 쓰여진 당시 상황에 부합된 해석입니다. 즉 성경 구절이 쓰여진 대상, 말하는 내용, 그리고 저자가 의도한 바와 일치된 해석입니다. 한 구절을 쓴 저자와 그 구절이 의도한 청중과 그 구절의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문장을 옳게 이해하도록 도와 줍니다. 또한 성경이 성경 자체를 해석한다는 사실도 아주 중요합니다. 즉 성경 구절 하나가 또 다른 성경 부분에서 언급한 주제나 화제를 얘기하고 있는 경우도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항을 서로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구절이 암시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닌 이상 항상 일반적으로 문자 그대로 평이하게 해석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암시하는 바를 무마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해석하는 사람이 한 구절이 의도하지 않는 바를 말할 가능성을 줄입니다. 즉 표현된 것 이상으로 더 깊은 더 영적인 어떤 것을 찾지 않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옳은 해석의 기준은 성경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모든 해석자의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객관적 해석의 기준은 없어지고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 해석만 남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20-21은 말합니다.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any private interpretation)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이상의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는데 있어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육적/혈연자손)과 교회 (모든 신자)는 두 개의 다른 그룹으로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오역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 (이미 성취된 것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 모두) 을 교회에 적용해서 해석하거나 교회의 것을 이스라엘에게 적용 해석할 때 오역을 가져옵니다. 기억할 것은 한 구절이 쓰여진 시대가 대상으로 삼은 청중들이 있다는 것과 이를 염두하고 해석해야 오역을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 개념을 마음에 두고 전천년설의 관점을 다루는 다양한 성경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2장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이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들이 있을 것과 그들이 나라를 이루어 한 땅을 점령할 것 그리고 전 우주적인 축복이 아브람의 혈통(유대인)에서 나간 모든 인류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5:9-17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는 데 있어 하나님은 이 언약의 전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십니다.즉 이 언약에 대해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혹은 하나님이 하신 언약을 취소시킬 수 있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는 유대인이 결국 점령할 땅의 한계를 정하고 계십니다. 정확한 경계에 대해서는 신명기 34장을 보시면 됩니다. 땅에 대한 약속을 다루는 다른 구절들은 신명기 30:3-5과 에스겔 20:42-44입니다

사무엘하 7장은 천 년간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사무엘하 7장 11-17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많은 자손들이 있을 것과 그의 자손을 통하여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사실 이 왕국은 천년 간 그리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고 지금은 아직 그 시간이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이 예언의 문자적 성취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견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솔로몬이 통치했던 땅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고 또한 솔로몬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는 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들이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고, 또한 사무엘하 7장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할 왕을 세우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다윗에게 한 약속의 성취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을 마음에 염두해 두고 요한계시록 20:1-7절에 기록된 것들을 연구해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잔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 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시록 20:1-7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된 천 년은 그리스도의 천 년간의 이 땅 위에서의 통치를 문자 그대로 가르칩니다. 여기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보면 그 약속에 있는 통치자는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하는 일인데 단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야 합니다. 전천년설은 이 구절을 미래에 성취될 약속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성취하실 일로 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다윗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약속을 하셨는데 아무것도 온전히 혹은 영원히 성취된 적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통치만이 아브람과 다윗에게 한 언약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유일한 길이 될 것 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적용하면 퍼즐 조각처럼 퍼져 있는 것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게 됩니다.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모든 예언들은 문자 그대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한 예언들도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천년설은 하나님의 언약들과 종말에 대한 예언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유일한 체계입니다.

예정론? 예정론은 자유의지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질문: 예정론은 무엇인가? 예정론은 성경적인가?

대답:
로마서 8:29-30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한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에베소서 1:5과 11은 말하길,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해 많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에 부합하는 교리입니다.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예정되었다는 말은 성경에서 그리스어로 “prorizo”라 하는데 “그 전에 결심하다”, “임명 받다”,”미리 결정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어떤 것이 일어나도록 미리 해 놓은 하나님의 결정을 뜻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무엇을 먼저 결정하셨습니까? 로마서 8:29-30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미리 운명적으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들을 미리 운명지어 놓으신 것입니다. 수 많은 성경구절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로서 선택받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22, 31; 마가복음 13:20, 27; 로마서 8:33; 9:11; 11:5-7, 28; 에베소서 1:11;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1:4; 디모데전서 5:21; 디모데후서 2:10; 디도서 1:1; 베드로전서 1:1-2; 2:9; 베드로후서 1:10). 예정론은 성경적으로서 하나님 그의 주권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사람만 선택하셨는가? 중요한 것은 아무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로마서 3:23), 모든 자들이 영원한 처벌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로마서 6:23).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지옥에 영원히 머물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몇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선택 받지 않은 자들에게 불의하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받을 정당한 결과 가운데 있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몇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불공평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20명의 사람 중에서 5명에게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가정해보세요. 돈을 받지 못한 15명은 화가 날까요?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낼 자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몇 사람에게 좀 후덕하게 행동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이 구원 받을 사람을 선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을 우리의 결정권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에서 말하길 우리는 선택의 자유 의지를 가졌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그러며 구원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10).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는 아무도 거부하시지 않으시고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 앞에서 돌아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신명기 4:29). 하나님의 미스터리 가운데 예정론은 하나님에 의해 인도 받은 사람 (요한복음 6:44)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 (로마서 1:16) 이 두 가지 사실 모두와 어느 정도씩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고, 또한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동일하게 진리입니다. 로마서 11:33을 보세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천계적 사관 (Dispensationalism)은 무엇인가?



질문: 시대적 경륜은 무엇이고 성경적인가?

대답:
시대적 경륜(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은 두 가지 주요 견해를 가진 신학적 입장입니다. (1) 성경, 특히 예언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합니다. (2)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합니다. 시대적 경륜(세대주의)는 성경 해석 원리를 문자적 해석에 두고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 (Literal interpretation)은 각 단어를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상징, 숫자나 문장 형식을 모두 평이하게 해석합니다. 심지어 상징적인 용어와 숫자적인 표현도 모두 문자적인 뜻을 찾아 해석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데에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철학적으로 언어 자체의 목적은 우리가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문자는 하나님이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주셨습니다. 둘째 이유는 성경에 근거합니다. 구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예언은 모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즉 예수의 탄생,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모두 구약에서 예언했던 대로 정확히,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예언 중 신약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은 없습니다. 이는 문자적 해석의 정당성을 강력히 지지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문자적 해석이 성경 공부에 적용할 수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게 됩니다. 반면에 성경적 해석은 “성경이 말씀하길…” 이라기 보다는 “이 문장이 내게 말하는 것은…”에 더 비중을 둡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성경적 해석 (biblical interpretation) 입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경륜(세대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과 교회 둘로 구분합니다. 구원은 항상 믿음에 근거하여 주어져 왔다고 믿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시대적 경륜(세대주의)은 하나님의 계획을 염두하고 볼 때 교회를 이스라엘에 국한시켜 해석해서는 안되고 그리고 구약은 이스라엘을 교회와 동일시해 이해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들(땅, 많은 자손, 축복)은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한 1,000년 기간 동안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있어서 교회에 초점을 두시는 것처럼 미래에는 다시 이스라엘에게 두실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9-11).

이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세대주의는 성경을 일곱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순결/무지 (창세기 1:1-3:7), 선과 악에 대한 의식 (창세기 3:8-8:22), 인간 정부 (창세기 9:1-11:32), 언약 (창세기 12:1- 출애굽기 19:25), 율법 (출애굽기 21:1-사도행전 2:4), 은혜 (사도행전 2:4-요한계시록 20:3), 그리고 천년 왕국 (요한계시록 20:4-20:6). 이런 구분은 구원에 이르는 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생활 가운데 자신을 개입시키는 길들입니다. 세대주의 하나의 체계로서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 왕국 통치가 일어난다는 견해(전천년설)와 대환란 전의 성도의 부활 (Pre tribulation)을 지지합니다.